소비의 신기루 속 헤매는 여자들
소비의 신기루 속 헤매는 여자들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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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마켓에 갔다가 실종된 가정주부 오인자씨(49세).
오인자를 납치한 여자아이는 수요일 일찍, 빼앗은 카드로 비키니를 미리 사두었다. 키가 커 보이는 디자인으로 빨강 색이다. 로베르타 이니셜이 무늬로 박혀 있다. 최고급 브랜드라는 걸 금방 알 수 있도록. 돈이 들어오면 그때는 한번도 못 가본 겔러리아 명품관으로 진출해야지. 거기서 로베르타 수준의 고급 옷을 몇 벌 더 사야겠다. 비치 드레스랑, 어깨 없는 파티 복이랑, 영화에서 본 옷들을...'

무한대에 이르른 우리들의 소비욕망 그 끝은 어디일까. 상품의 노예가 되어 살고 있는 자본주의 시대와 세태를 유쾌하게 진단한 작품 하나가 눈길을 끈다.

아파트들이 빼곡이 들어서 있는 거리에 커다란 창고형 슈퍼마켓이 딸린 5층 짜리 백화점이 있다. 이 백화점은 대량선전, 물량공세, 가격파괴 등으로 부근에 있는 어줍잖은 잡화점들을 모조리 삼켜버린 공룡 같은 존재다. 이남희의 <수퍼마켓에서 길을 잃다-R&D BOOK 출판사, 8천원>는 그 공룡의 텃밭에서 각자 길을 잃고 헤매는 여자들의 이야기다.

여주인공 김선영은 거의 매일 그 백화점에 간다. 거기에 가면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무엇을 소비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유행과 변화를 몸으로 느끼며 선영은 진열대 사이를 이리저리 누빈다. 지불 능력이 없을 때는 원하는 상품들을 옷깃 사이나 허벅지 고무 밴드에 숨겨 가지고 나온다.

두 번째 여자 오인자 역시 하루도 빠짐없이 쇼핑하는 습관이 있다. 남편의 젊은 제자를 마음에 두고 있지만 자신이 그에 비해 너무 늙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남편의 제자보다 더 어린 남자 판매원들이 자신을 늙은 여자 혹은 가정주부가 아니라 유럽의 상류사회 여자로 대접해주는 그곳을 헤맨다.
세 번째 여자 오현수는 키가 너무 작아 초등학생 같은 느낌을 준다.

현수는 키를 키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노력하지만 극복되지 않는다. 작은 키라는 벽에 부딪혀 평범하게 학교 생활을 할 수 없었고, 변변한 직장을 얻을 수 없었을 뿐 아니라, 주변 사람들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한다. 작고 아담한 여자가 미인 대접을 받는 시대에 태어나지 못하고 메마르고 키 큰 여자가 미의 기준으로 자리잡은 이 시대에 태어난 현수는 불행 그 자체다.

세 여자가 공룡 같은 백화점에 같은 날 나타난 것이 문제였다. 오현수는 키가 커 보이는 비키니를 살 돈을 마련하기 위해 오인자를 납치하게 되는데, 김선영이 이를 백화점 주차장에서 목격한다. 하지만 김선영은 슈퍼마켓의 물건을 훔친 자신의 잘못이 드러날까봐 목격 사실을 부인한다. 오인자는 중근이라는 젊은 남자에게 강간당하고 오현수에게 카드를 빼앗긴 후 실종된다.

소설은 백화점의 미로가 여성들에게 얼마나 위험한가를 경고하고 있다. 백화점 전체는 포스트모던 건축 양식으로 금방 출구를 찾지 못하게 설계되어 있고, 여자들의 시선을 조금이라도 더 상품 쪽으로 빼앗기 위한 상업적인 전략으로 배치되어 있다. 남성보다 여성에게 물품 구매력이 집중되어 있는 한국 사회에서 표적은 당연히 여성이다. 소비사회는 여성들을 욕망과 행복의 신기루에 빠뜨리면서 끊임없이 지갑을 열도록 유도한다.

결국 매스컴과 광고에 의해 양식화된 욕망을 쫓다가 여성들은 길을 잃고 만다. 즉, 여성들은 슈퍼마켓이나 백화점에서, 아니 그들이 일구어내야 할 삶의 현장에서 길을 잃는 것이다. 백화점에서 한 여자를 헤매게 만드는 것은 상품으로 둘러싸인 복잡한 길뿐만이 아니라 비교되고 비교당하는 서로의 욕망이기도 하다. 김선영과 오인자와 오현수, 세 여자가 스스로 헤매면서 동시에 다른 여자의 미로 역할을 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물질 만능주의가 만들어놓은 소비의 신기루는 그래서 남성보다 여성에게 더 끔찍한 도미노식 덫을 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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