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임진왜란 흔적]-강항( 4회),후지와라 세이카를 만나다.
[일본의 임진왜란 흔적]-강항( 4회),후지와라 세이카를 만나다.
  • 김세곤 여행칼럼니스트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4.06.11 16:13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598년 6월이 되자 도도 다카도라가 조선에서 철수하여 왜경(倭京)으로 돌아왔다. 그는 부하를 보내어 강항 일가를 오사카로 데려오라 하였다.

8월 8일에 강항 일행은 오즈성을 떠났다. 강항은 배 안에서 시 한 수를 지었다.

가슴에 근심 가득 벌집처럼 찢긴 가슴

삼십에 귀밑머리 서릿발이 일었어!

네가 이리 여위고 이리도 마른 것

고국이 그리워 그리워서야!

명의를 중히 여겨 글 읽던 나이지만 平日讀書名義重

후일에 보면 시비가 많을 것일세 後來觀史是非長

요동학이란 말은 내게는 당치도 않아 浮生不是遼東鶴

바닷가에서 양떼 치나니 죽지 못해 사는 거야 等死須看海上羊

이 시에서 ‘바닷가에서 양떼를 치는 간양’은 중국 전한 시대 소무(蘇武, ? ~ 기원전 60년)가 흉노의 포로로 잡혀가서 북해(北海; 바이칼호)의 황무지에서 양떼를 치면서 환난의 세월을 보낸 다음에 귀환한 것을 의미한다.

이윽고 배가 떠난 지 8일이 된 지루한 뱃길이었다.

강항은 새벽녘에 곤히 잠이 들었다.

“서울이요, 서울이 다 왔어요!”

배 안에 있는 우리나라 사람이 말하기에 깜짝 놀라 일어나 보니 10층 누각이 푸른 바다 위로 솟구쳐 보였다. 오사카 성이었다.

오사카 성

강항 일가가 오사카에 도착한 것은 9월 11일이었다. 이들은 며칠 동안 오사카에서 지내다가 다시 작은 배에 실려 후시미(伏見)로 옮겨갔다. 우치하(宇治河)에 도착하니 왜적에게 빼앗긴 우리나라 병선(兵船)이 기슭에 놓여 있었다.

강항 일가는 후시미 어느 빈집 창고에서 기거하였다. 후시미에는 이미 여러 조선 선비들이 있었다. 동래 김우정, 하동 강사준 · 강천추 · 정창세, 함양 박여즙, 태안 전시습, 무안 서경춘 등이었다.

후시미 모모야마 성

후시미에서도 강항은 고향으로 돌아갈 계책을 도모하였다. 그는 왜승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1561-1619 순수좌 舜首座)에게 글씨를 팔아 은전(銀錢) 50여 개를 얻었다.

강항이 글씨를 판 내역을 살펴보자. 의사(醫師) 요시다 의안(意安)과 요시다 소안이 명성을 듣고 강항을 찾아왔다. 이후 강항은 요시다 의안이 저술한 『역대명의약전 歷代名醫略傳』 서문을 써 주었다. 그리고 의안은 스승인 후지와라 세이카를 강항에게 소개하였다.

후지와라 세이카는 교토 상국사(相國寺)의 선승(禪僧)이었는데, 주지 다음으로 높은 직책인 수좌(首座)였다. 세이카는 불교경전 외에도 주자학서적을 접하였고, 1590년에 조선통신사로 정사 황윤길, 부사 김성일 일행이 교토에 왔을 때 사절단을 만났다. 그는 서장관 허성에 감명 받아 조선유학에 대하여 본격적으로 공부하고자 하였다.

한편 세이카는 하리마 영주 아카마쓰 히로미치(적송광통 赤松広通:1562-1600)의 부탁을 받아서 강항으로부터 병풍 글씨를 받았다.

히로미치는 환무천황(桓武天皇)의 9대(九代)손으로 육경(六經)을 독실하게 좋아한 다이묘(大名)였다. 그는 1585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 단마 다케다성(但馬 竹田城)을 하사받았고 관직이 좌병위독(左兵衛督)이었다.

이후 세이카는 강항을 비롯한 10여 명의 조선 선비들에게 『사서오경 (四書五經)』의 필사를 부탁하였다. 필사작업이 끝나자 세이카는 사서오경에 왜훈(일본식 주석)을 달아 20권에 달하는 『사서오경왜훈(四書五經倭訓)』을 냈다. 이어서 세이카는 강항에게 발문을 써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강항은 『사서오경왜훈』의 발문을 썼다.

이처럼 글씨를 써주고 번 돈으로 강항은 몰래 배 한 척을 사서 동래 사람 김우정과 서울 사람 신덕기, 진주사람 사공 정연수 등과 함께 빠져 나가려 하였다. 강항과 형 환(渙), 처부(妻父) 김봉 등은 미처 나서지 못하고, 형 준(濬)이 사공과 통역을 데리고 배 타는 장소로 갔다.

그런데 바닷가에 사는 왜인이 몰래 도도 다카도라에게 밀고하였다. 왜적은 왜졸을 풀어 수색하여 이들을 잡아 20여 일을 감금하였는데, 통역들은 다 죽였고, 나머지는 한참 뒤에 풀려났다.

(강항 지음 · 이을호 옮김, 간양록, 서해문집, 2005, p 25-27, 212-229)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윤진한 2024-06-15 23:34:35
필자는 성균관대 출신입니다. 불교 Monkey 일제강점기의 종교정책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대처할 수 있습니다.
https://blog.naver.com/macmaca/2234640145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