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임진왜란 흔적]-교토의 코무덤 (2)
[일본의 임진왜란 흔적]-교토의 코무덤 (2)
  • 김세곤 여행칼럼니스트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4.03.25 17: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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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 무덤에 관한 일본의 기록은 여러 군데에 나온다.

이총공원

가토 기요마사의 『고려진 각서』에도 “1597년에는 왜군 한 명당 조선인의 코가 3개씩 할당되어, 그 코가 소금에 절여 일본에 보내졌고, 대불사 앞에 무덤을 쌓아두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코베기는 정유재란 때인 1597년 8월부터 10월까지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는데 왜군 장수들은 코를 자루나 통발에 담아 일본에 보냈고, 자루나 통발 하나에는 1,000-3,000명분의 코가 들어 있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휘하의 검수관은 그 수를 세어 확인하고 영수증을 발행하였고, 논공행상의 자료로 삼았다.

1597년 9월 2일부터 10월 10일까지 검수관이 발급한 코 증명서는

기카와 히로이에가 9월 18일에 1,245개, 9월21일에 진원현에서 870개, 9월 27일에 영광과 진원현(지금의 장성군 진원면)에서 10,040개, 10월초 3,487개였고, 나베시마 가츠시게는 9월14일에 1,551개, 9월 하순에 금구와 김제에서 3,369개였다.
구로다 나가마사는 9월6일에 3,000개, 9월14일에서 9월 30일 사이에 2,447개의 코 증명서를 받았고, 시마즈 요시히로는 9월6일-9월9일 250개, 9월12일에 61개의 코증명서를 받았다.

이를 보면 왜군들이 1597년 8월 16일에 남원성을 함락하고 전라도를 완전히 장악한 시기에 코 베기가 상당수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오카와치 히데모토의 『조선물어』에는 남원성 함락 이후 일본의 악행이 적혀 있다.

“판관은 대장이므로 머리를 그대로 보내고, 그 외에는 전부 코를 잘라 염석회를 써서 항아리에 가득 채우고, 남원의 50여 구획의 그림과 보고서를 첨부해서 일본에 진상했다. 총 머릿수는 도합 3,726구였다.”

이처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코 자루와 통발들을 마차에 싣고 오사카와 교토를 돌면서 일본 백성들에게 보여줌으로써 히데요시의 승리와 무위가 얼마나 위대한지를 각인시켰다.

그런데 코 무덤은 교토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후쿠오카현 카시이,

오카야마현의 비제시(備前市)와 쯔야마시(津山市), 가고시마 성 부근에도 코 무덤이 있다. 교토의 코무덤에는 어림잡아 5만 개 정도의 코가 묻혀 있고, 일본 전역에는 적어도 10만 개 이상의 코가 묻혀 있다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한편 교토 코 무덤 앞에는 글씨도 잘 안 보이는 비가 하나 있다.

비석의 비문 일부를 읽어보자.

코무덤 앞의 비문
코무덤 앞의 비문

“(전략) 주군(히데요시)은 장수들에게 명하여 다시 조선을 정벌하였다. 그러자 명나라가 음흉하게도 무너지려는 자신의 제후국을 구하려 수천의 병사를 파병하여 조선을 도왔다.
우리의 장수들과 병사들이 성채와 마을을 평정하였는데 ... 거리가 멀어서 우리 군대의 승전을 주군이 확인할 수 있도록 코를 보내왔다.

주군이 이를 확인할 때에 더 이상 복수의 마음을 품지 않으시고 오히려 불쌍하게 여기셨다. 그리하여 주군이 고잔(五山)의 선승들에게 명하여 죽은 자 들의 평안과 명복을 빌기 위하여 신성한 제단을 세우고 코 무덤이라고 명명하였다. (후략)”

비문은 히데요시의 잔혹성을 미화한 글임을 단숨에 알 수 있다. 코무덤을 세운 것이 자비심의 발로라고 표현하다니 정말로 역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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