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68회]-이순신 장군 추모 흔적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68회]-이순신 장군 추모 흔적
  •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24.01.29 12: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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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징비록

1598년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이순신이 노량해전애서 전사했다. 우연하게도 이 날 선조는 류성룡을 파직했다.
안동으로 낙향한 류성룡은 1604년에 ‘징비록(懲毖錄)’을 썼다. 다시는 이런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징계하는 의미였다.

충민사
충민사

징비록 ‘서문’을 읽어보자.

“징비록이란 무엇인가?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의 일을 기록한 글이다. (...) 아아, 임진년의 재앙은 참으로 가혹하였다.
수십일 사이에 한양 개성 평양 세곳의 도성을 지키지 못하였고 팔도가 우르르 무너져 임금께서 난을 피해 한양을 떠나게 되셨다. 이러한 일을 겪고도 지금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은 하늘이 도와주신 것이다. (...)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내가 지난 일을 경계하여 앞으로 후환이 생기지 않도록 대비한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내가 징비록을 지은 까닭이다. ”(류성룡 지음·오세진 외 2인 역해, 징비록, 2015, p 17)

# 이순신 추모

이순신의 순국하자 호남 백성들과 수군들이 자발적으로 사당과 비를 세웠다. 스님들도 이순신을 추모했다.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지은 ‘이충무공 행장’과 ‘선조수정실록’에 나온다.

1598년 11월 1일 자 ‘선조수정실록’에는 바닷가 사람들이 자진하여 충민사를 지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전략) 바닷가 사람들이 자진하여 사우(祠宇)를 짓고 충민사(忠愍祠)라 불렀다.”

충민사는 이충무공과 관련된 최초의 사액사당으로서 통영의 충열사보다 62년, 아산 현충사보다 103년 빠르다.

‘충민사기(記)’는 영의정 이항복이 1600년에 지었고, 사당에는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보성군수 안홍국이 배향되었다.

여수 고소동 고소대에는 1615년에 제작된 ‘통제이공수군대첩비 (統制李公水軍大捷碑 보물 제571호)’와 1603년 가을 전라좌수영 수군 졸병들이 이순신의 죽음을 슬퍼하면서 에 세운 ‘타루비(墮淚碑 보물 제1288호)’가 있다.

‘통제이공수군대첩비(統制李公水軍大捷碑)’는 ‘전라좌수영대첩비’라고도 하는데 영의정 이항복이 비문을 지었다.

통제이공수군대첩비
통제이공수군대첩비

글자 그대로 ‘눈물이 떨어진다.’는 타루비는 비음 (碑陰)에, “영하(營下)의 수졸(水卒)이 통제사 이공을 위하여 짤막한 비석을 세웠다.”고 적혀 있다.

타루비는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의 장수이자 정치가인 양호(羊祜 221-278)의 고사를 인용하여 세웠다. 양호는 갑옷을 입지 않은 채 항상 가벼운 옷을 입고 허리띠를 느슨하게 풀어 놓고 있었는데도 군사들이 모두 그 덕에 감복하였고, 양호가 죽자 적국인 오나라 군사들까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가 오랫동안 태수로 있었던 양양 지방(현 후베이성 상양)사람들이 그가 즐겨 노닐던 현산(峴山)에 비를 세웠는데, 그 비를 보고서 사람들이 눈물을 흘려서 타루비로 널리 알려졌다. 정식 명칭은 ‘진정남대장군양공호지비(晉征南大將軍羊公祜之碑)’이다.

그런데 타루비는 일제 강점기에 행방불명되었다가 광복 후 경복궁에서 발견되었다. (김대현 지음, 충무공 이순신, 예맥, 2014, p 137-139)

한편 아산 현충사 정문 입구에도 타루비 복제품이 세워져 있다. 여수에 진본이 있으니 그 진가가 매우 높으리라.

타루비

아울러 호남의 승려들은 이순신을 위하여 제사를 올렸는데 산사(山寺)마다 올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특히 자운과 옥형 스님은 흥국사에 있었는데 3백 명의 승군을 이끌고 이순신을 도와 많은 공을 세웠다.
두 스님은 충민사 옆에 석천사(石泉寺)를 지어 이순신을 추모하였다. 석천사 의승당에는 나무 기둥마다 이순신 장군, 옥형, 자운 스님과 의승군을 기리는 글이 새겨져 있다.

영남 백성들도 사사로이 착량(窄梁 경남 통영시)에다 초가로 사당을 짓고 어디로 나가거나 돌아올 때 마다 반드시 제사를 지냈는데, 착량은 한산도에서 가까운 곳이기 때문이다.
그후 이운룡이 통제사가 된 후에 민심을 따라 거제에다 큰 사당을 짓고는 전선이 출항할 때 마다 반드시 가서 아뢰었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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