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56회]-명량대첩의 진실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56회]-명량대첩의 진실
  •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23.10.23 14: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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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대첩은 가장 드라마틱한 해전이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사실과 다른 허구적 내용들이 덧붙여졌다. 더구나 TV 드라마나 영화는 흥미 위주로 허구적 요소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역사는 사실(fact)에 충실해야 한다.

명량대첩비 (해남군 문내면)

명량대첩과 관련된 허구적 요소는 크게 세 가지이다.

1. 조선과 일본의 전선 수
명량해전은 13척의 배로 133척의 왜선과 싸웠다는 것이 정설이다. 그런데 1686년(숙종 14)에 이민서는 ‘통제사 충무이공 명량대첩비(統制使忠武李公 鳴梁大捷碑)’비문에 10척의 배로 5백 척의 왜군을 무찔렀다고 적었고, 정조는 ‘홍재전서 전선인(戰船引)’에서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13척으로 적선 6백여 척을 격파했다고 썼다. (홍재전서 제13권 / 서인(序引) 6/ 익정공주고군려류서 翼靖公奏藁軍旅類叙, 전선인)

1956년에 이은상은 ‘진도 벽파진 전첩비’에서 12척의 배로 3백 척의 왜군과 싸웠다고 적었고, 1,760만 명이 본 ‘명량’ 영화는 12척의 배로 330척에 맞섰다.

2. 철쇄설
이는 격량이 심한 명량해협 300여 미터에 철쇄를 설치하여 왜선이 좌초되게 하였다는 이야기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철쇄설’은 사실이 아니다.

그 근거를 살펴보자.
첫째, 명량해전 당시나 직후의 역사적 기록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즉 ‘난중일기’나 ‘선조실록’에 관련 기록이 없다. 둘째, 철쇄설은 18세기 후기에 ‘택리지’와 ‘호남절의록’에 나온다. 먼저 이중환(1690-1752)이 1751년에 쓴 ‘택리지’에는 “이순신이 철쇄를 만들어 돌다리에 가로질러 놓고 왜선을 기다렸는데 왜선이 다리 위에 와서 철쇄에 걸렸고 급류에 휩싸여 500여 척이 침몰했다”고 적혀 있다. 왜선 500여 척이 침몰했다니 황당하다.

다음에 1800년에 간행된 ‘호남절의록’에는 전라우수사 김억추가 쇠사슬을 걸어 왜선을 격침시켰다고 되어 있다.
“김억추는 정유재란 때 전라우수사가 되었는데 충무공이 힘을 합쳐 적을 토벌하자는 뜻의 격문을 공에게 보내오니 공은 즉시 진도에 가서 만나 여러 방략들을 마련하는 데 많은 힘이 되었다.
쇠사슬을 명량에 가로질러 설치하여 우리 배가 지날 때는 거두고 적의 배가 지날 때는 걸도록 하였는데 쇠사슬이 너무 무거운 지라 여러 장수들 중 아무도 그 일을 해 낼 수가 없었다.
공이 때에 맞춰 걸고 거두는 것을 아주 쉽게 하였으므로 이순신이 그 용력의 절륜함에 탄복하였다.”

일본도 명량해전에서 패전한 것이 철쇄 때문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1892년에 세키 코세이는 일본 육군 장교들이 보는 소책자 ‘조선 이순신전’에서 이렇게 적었다.

“일본 수군은 원균을 격파하고 나서 전라도 바다에 진출한 다음 충청과 경기를 치고자 하였다.
9월 16일에 선봉 간 마사카게는 함선 2백여 척을 이끌고 명량도로 나아갔다.

이순신은 명량도 입구의 석량에 철쇄를 걸쳐두고 기다렸다.
간 마사카게의 선봉이 철쇄 위를 통과할 때 철쇄를 끌어 당겨 배를 전복시켰다.
뒤를 따르던 배들은 앞배가 침몰하는 것을 보고 노의 방향을 돌리려고 하였다. 하지만 바닷물의 흐름이 빨라 배를 돌리지 못해 명량도 입구에서 일시에 전복된 배의 수효가 헤아릴 수 없었다.
이 틈을 타고 이순신은 함대를 이끌고 화포를 쏘아대는 한편 조류의 흐름을 이용해 공격을 퍼부었다.
일본 수군은 크게 패하였으며, 간 마사카게는 전사혔다. 이순신의 군대는 크게 위용을 떨쳤다.” (사토 데스타로외,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 2019, p 84-86)

철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순신이 1592년 4월에 여수 앞바다에 철쇄를 설치한 일을 그 근거로 들지만, 이순신이 며칠 만에 조류가 센 명량에 철쇄를 설치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된다.

3. 거북선 출전설
거북선 출전설은 이순신의 조카 이분이 지은 ‘이충무공 행록’에 근거한 듯 보인다.0
“8월 18일 회령포에 이르니 전선이라고는 단지 10척 뿐이었다. 공은 전라우수사 김억추를 불러서 병선을 거두어 모으게 하고, 또 여러 장수들에게 분부하여 거북선 모양으로 꾸며서 군사의 위세를 돋우도록 했다.”

그런데 이순신의 조카 이분은 명량해전 전후로 이순신 휘하에 종군한 사실이 없다.
만약 거북선이 참전하였다면 명량해전을 소상히 기록한 9월 16일의 ‘난중일기’에 반드시 언급이 있었을 것인데 ‘난중일기’엔 거북선이란 단어가 아예 안 나온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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