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밤의 서늘한 감촉
가을밤의 서늘한 감촉
  • 문틈 시인
  • 승인 2023.09.09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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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저녁으로 날씨가 서늘해지자 풀숲에서 여름에 못듣던 벌레 소리들이 들려온다. 수많은 크고 작은 현악기들이 한꺼번에 연주하는 듯한 맑은 소리들. 뚜르 뚜르, 찌르르 찌르르, 쉬리 쉬리, 말로 다 형용하기 어려운 고운 소리들이다.

도시의 시멘트 거푸집에 살면서 아침저녁으로 풀벌레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아무렴 호사스런 일이다. 어린 시절 시골에 살 때 마당에 덕석을 깔아놓고 별들이 쏟아질 듯한 밤하늘을 바라보며 가슴이 떨리던 그 순수한 마음을 풀벌레 소리들은 되돌려 주는 듯하다.

잠못 들어 뒤척이는 영혼에 와 닿는 저 풀벌레 소리들. 밤새워 풀벌레 소리들이 자아내는 소리의 향연을 사람들은 까마득히 잊은 채 방마다 불을 끄고 허공에 매달려 곤히 잠들어 있다.

풀숲에 함부로 흩어져 있는 보석들이 있어 빛을 발한다고 생각해보라. 나는 풀벌레 소리들이 보석에 빗대어 반짝이는 소리들이라고 말하련다. 보석들이 찬란한 빛을 발하듯 풀벌레들도 밤을 도와 소리의 빛을 찬란히 반짝인다.

하늘에서는 별들이 반짝이고 땅에서는 풀벌레들의 소리가 반짝이고. 참 아름답고 은혜로운 풍경이다. 풀벌레 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물리지 않는다. 어쩐 일로 밤을 도와 풀벌레들은 제가끔 고유한 목소리를 내어 소리하는 것일까.

무엇인가 애타게 찾거나 부르거나 아니면 그들에게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경전을 읽고 있거나.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애써 잠을 쫓으며 나는 저 대자연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공연하는 연주를 밤이 늦도록 눈물 그렁그렁 듣는다.

풀벌레들은 악보도 없다. 지휘자도 없다. 그들은 먼 먼 옛날부터 대를 이어 악보를 암보하여 원전을 자손에게로 건네준다. 풀벌레들은 애초에 자신이 악보요, 악기요, 지휘자로 태어난다. 이런 신비스럽고 놀라운 내력을 가을밤은 잠못 드는 나에게 들려준다.

그럴 수만 있다면 나도 저기 풀숲에 가서 풀벌레들한테 소리를 배워 한 소리를 해보고 싶다. 뚜르르 뚜르르. 그러나 자연은 나는 연주자가 아니라 관객이라며 손사래를 치며 끼어주지 않는다.

삼라만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아니 무생물까지도 자연법에 순응한다. 새들, 산짐승들, 물고기들, 나비들, 심지어는 바위나 물까지도 자연법에서 한 치도 어긋나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자연법을 벗어나려 몸부림친다.

‘아는 것이 힘이다’는 포크레인을 들이대며 우주만물에 깃들어 있는 오묘한 신비를 파헤쳐 숫자로 공식으로 규정하려 한다. 그러나 인간은 암만해도 풀벌레 소리를 내지 못한다. 인간은 자연의 일원이면서도 애써 자연에 순응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되레 자연의 법칙을 벗어나 문명을 창조하여 자연을 정복하려 한다.

하지만 인간은 그가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른다. 풀벌레가 아는 것을 인간은 모르고 있다. 나는 자연에 절대 순종하여 한 치의 어긋남이 없이 가을밤을 연주하는 풀벌레들을 ‘깨달은 자’라고 말하고 싶다. 맞다, 그들은 가을밤에 오도송을 노래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므로 인간인 우리는 풀벌레 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혹은 눈물을 흘리며, 혹은 뜬눈으로 밤을 새며, 가슴 떨리는 감동을 받을 때 자연이 숨겨놓고 한사코 인간에게 보여 주려 하지 않는 진리의 한 조각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

전 우주의 운행 법칙을, 대자연의 생명 현상을, 삶의 궁극적 진리를, 가을밤의 서늘한 기운을 타고 풀벌레들은 아름다운 소리로 말하고 있다. 인간이 미물이라 칭하는 저 풀벌레들은 수만 년, 수백만 년 전부터 그 오묘한 비밀을 자기들끼리 전하며 가을밤을 노래하고 있다.

만일 어릴 적 밤하늘의 별들을 보고 무한천공의 신비를 체험한 사람이라면 풀벌레들이 자아내는 고운 소리에서 한 소식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 자연은 인간들에게 무슨 말인가를 들려준다. 다만 안타깝게도 우리가 못알아 들을 뿐이다.

나는 풀벌레 소리들을 들으며 길게 풀숲을 향하여 손을 내뻗어 가을밤의 서늘한 자연법에 감촉하려 한다. 신비와 경이의 풀벌레 소리가 내 영혼으로 연결되어 나를 우주와 통하게 하려는 양. 누군가 풀벌레 소리를 듣고 깨우친 자 있거든 내게 말해다오. 가을밤에 반짝이는 저 풀벌레 소리들의 신비한 뜻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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