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45회]-선조, 이순신을 하옥하다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45회]-선조, 이순신을 하옥하다
  • 박병모 기자
  • 승인 2023.07.23 18: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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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한산도 수루

1596년 9월에 명나라와 일본 간의 강화협상이 파탄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 재침략 명령을 내렸다. 군대를 1번 대에서 8번대로 편성하고 12만 1천 명을 동원하였다. 여기에는 부산 일대에 잔류하고 있던 2만여 명 왜군도 합류시켰다.

부대는 1군이 가토 기요사마 1만 명, 2군이 고니시 유키나가 14,700명 3군 구로다 나가마사 1만 명, 4군 나베시마 나오시게 12,000명, 5군 시마즈 요시히로 1만 명, 6군 조소가베 모도지가 13,300명, 7군 와키자카 야스하루 11,000명, 8군 모리 데루토모, 우키다 히데이에 4만 명 등이었다.

히데요시는 재침략을 준비하면서 1592년부터 1596년까지 5년간의 전쟁을 면밀히 분석하였다. 그 결과 조선 침략이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첫째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제해권을 장악한 점, 둘째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하여 양곡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점이 주된 요인이었다.

그리하여 히데요시는 치밀하게 재침략 지시를 내린다. 이 지시에는 가장 먼저 이순신을 제거한 후에 조선 수군을 궤멸시킬 것, 전라도부터 공격하고 충청도와 경기도는 정세에 따라 진격할 것, 군인과 양민 및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든지 참살할 것, 명나라 군대가 나오면 즉시 보고할 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매년 군대를 출동시켜 조선 사람들을 전부 죽여 조선을 빈 땅으로 만든 다음 서도(일본의 서쪽)의 사람들을 옮겨 조선에 살게 하고, 동도의 사람들을 옮겨 서도에 살게 하면 10년 후에는 반드시 성공이 있을 것”이다.

한산도 수루 내부
한산도 수루 내부

(히데요시의 포고문)
1597년(정유년) 1월 중순에 일본이 조선을 재침략했다. 정유재란(丁酉再亂)이었다. 가장 먼저 왜군은 이순신을 제거할 반간계를 쓴다. 고니시는 요시라를 경상우병사 김응서의 진중에 보내어 밀서를 전달한다. 요시라는 고니시의 사위인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의 부하인데, 김응서와 1595년 봄부터 밀접한 접촉이 있는 이중간첩이었다.

“이번에 강화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은 가토 탓이다. 고니시는 가토를 미워하여 죽이려 하고 있다. 가토가 며칠 뒤에 조선에 상륙할 것이니 조선 수군이 가토를 해상에서 없애면 좋겠다. 이러면 조선의 원수도 갚고 고니시의 마음도 좋으리라.”

1월 11일에 요시라로 부터 고니시의 밀서를 받은 김응서는 급히 조정에 장계를 올렸다. 1월 19일에 김응서의 장계를 본 선조는 이순신에게 출정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이순신은 ‘바닷길이 험난하고 왜적이 필시 복병을 설치하고 기다릴 것이다. 전함을 많이 출동하면 적이 알게 될 것이고, 적게 출동하면 도리어 습격을 받을 것이다’ 하고는 출전하지 않았다.(선조수정실록 1597년 2월 1일) 그런데 가토는 이미 1월 13일에 다대포에 도착한 상태였다.

반간계에 실패하자 요시라가 다시 김응서 진영에 나타났다.
“가토가 이미 다대포에 도착하였답니다. 어째서 조선 수군이 그냥 놔두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말을 철썩같이 믿은 김응서는 다시 조정에 아뢰었다. 1월 23일에 김응서의 보고를 접한 선조는 “이순신이 출전하지 않아 우리나라가 이제 끝났다.”는 극언까지 했다.

1월 27일에 선조는 오전과 오후 두 번에 걸쳐 어전회의를 열었다. 선조는 이순신을 용서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이순신과 원균이 수군을 나누어 통제할 뜻을 비추었다. (선조실록 1597년 1월 27일 3번째 기사)

1월 28일에 선조는 전라병사 원균을 경상우도 수군절도사 겸 경상도 통제사로 삼아 수군을 지휘하게 하였다. 수군 통제권을 양분한 것이다.

2월 4일에 사헌부가 통제사 이순신을 잡아들여 죄를 물어야 한다고 아뢰었다. 이러자 선조는 천천히 결정하겠다고 답하였다.

그런데 이틀 후인 2월 6일에 선조는 이순신을 잡아 오도록 우부승지 김홍미에게 은밀히 전교했다.

2월 26일에 금부도사는 이순신을 한산도에서 서울로 압송하였다. 이 당시에 이순신은 수군을 거느리고 부산 가덕도 바다에 있었는데 그를 잡아오라는 어명이 내려졌다는 소식을 듣고 곧 한산도로 돌아왔다. 이순신은 원균에게 인수인계하고 함거에 올랐다. 전선 180척, 군량 9,914석, 화약 4천 근, 총통 300자루 등이었다.

이순신이 소달구지에 실려 서울로 올라가자, 백성들이 에워쌌다. 백성들은 “사또 어디로 가시오. 이제 우리들은 다 죽었습니다.”라고 울부짖었다.

3월 4일 오후에 서울에 도착한 이순신은 곧바로 의금부에 갇혔다.

사람들이 면회를 왔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임금의 노여움이 극에 달하였고, 또 조정의 중론도 엄중하여 사태를 알 수 없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라고 걱정하였다. 이순신은 차분하게 “죽고 사는 것이야 운명이지요, 죽어야 한다면 죽어야지요.”라고 말했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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