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공원에서 만난 '꽃다지'
518공원에서 만난 '꽃다지'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7.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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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인이 노래했다. <이 곳이 아닌 다른 곳에 가고 싶다> 라고.

가족 모두 웃고 있는 사진 하나와 한번도 보지 못한 화가의 낙관이 찍힌 동양화가 걸려 있는 거실 한 귀퉁이엔 너무도 이질적이어서 오히려 어울리는 바퀴 달린 진한 색의 여행 가방이 세워져 있다. 언제든지 기회만 닿으면 이곳이 아닌 다른 곳으로 떠나야하니 그리해야한다.

마당 가득 차 오른 햇살 속으로 앵두나무 하얀 꽃이 분분히 떨어지던 어느 봄날, 광주에서 축제가 열리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엔날레가 주는 매력에 끌리어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두 아이들 데리고 먼 여행길에 올랐다. 다섯 시간 넘게 버스 속에 앉아 낯선 도시를 떠올렸다.

그곳에는 어떤 모습의 삶이 메워져 흐르고 있을까. 어쩌면 내가 살고 있는 곳과 아무 차이도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난 기필코 찾아내리라. 무엇이든 찾아내어 여행 가방에 꼭꼭 챙겨 돌아오리라는 희망이 너무도 어설프고 희미한 내 삶 같아서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앵두나무 꽃 분분히 날리던 날, 길을 떠나다

"얘들아, 엄마는 지금 내 안에 들어와 있어."
바닥과 천장과 벽이 모두 거울로 된 환상 속에 앉아 내 안에 있던 모든 것이 밖으로 세어 나오는 것을 방치하고 있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내 모습이 몹시도 부끄러워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

"나도 내 물건을 이렇게 모아 둘 거야."
큰아이는 오밀조밀 지난 흔적을 모아 진열된 장식장 앞을 떠나기가 싫은지 머뭇거렸다.

검은 색과 흰색이 반복되어 칠해지는 광경을 목격하고 나는 그만 맥이 빠졌다. 아마 <소모>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지. 시간은 흘러가는 거구, 사람들은 제각각 최선이라 확신하며 선택한다. 멈추어 버릴까. 가도 그만, 안 가도 그만인 것을 왜 애쓰나. 그러나 난 사진 한 장을 찍고 지나쳤다. 어차피........

오해. 벽면 가득 같은 크기의 액자가 일정한 간격으로 걸려 있고, 액자 속에 각기 다른 물건으로 채워져 있는 작품 앞을 무심한 표정으로 지나가는 한 여인을 붙들어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그녀의 귀에 꽂아 주었다. 그녀는 설명을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난 그런 줄 몰랐어요. 과거의 물건을 진열한 작은 액자들이 많이 있구나 했어요. 아, 이런. 같은 가치의 물건이라니. 그런데 난 바꿀 것이 없네요."
주머니 속, 가방 속을 뒤집어 털어 내어 몽땅 저 액자 속에 있는 물건과 바꾸고 싶었다.

춤추고 싶을 때 춤출 수 있는 문화

본능의 춤이 있었다. 보라매 홀 맨 바닥에 다리 펴고 벽에 깊숙이 기대앉아 춤이 추고 싶어 몸이 뜨거워 졌다. 그러나 난 춤을 추지 못했다. 어쩔 수 없는 사고의 속박, 고정관념의 틀,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너희들은 춤추고 싶을 때 출 수 있는 그런 문화를 만들어라. 바램이다.

자판기 앞에 아무렇게나 놓인 커다란 방석 위에 몸을 던졌다. 아이는 아예 누워 버렸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았다. 아마도 그들에게 우리가 행위예술의 한 일원으로 보였을 지도 모른다. 멋진 일이다. 작가들이 바라던 것일 테지.

돌고 또 돌고 전시장을 이틀 간 돌았다. 차시간에 쫓겨나오며 점심을 거른 사실을 알고 우리는 근처 식당에 들어가 김밥을 주문했다. 후하다 들었는데 정말 후한 인심이었다. 김밥 몇 줄에 김치가 두 가지, 국까지 딸려 나오는 것을 처음 대하는 우리는 먹는 동안 내내 탄성을 질렀다.

"광주에 살면 돼지 될 거야. 그쵸?"
"그래도 좋으니 이사올까?"
"ㅎㅎㅎㅎㅎ"

5. 18 공원은 한산했다. 아파트가 들어선 지 오래지 않아 그런지 날이 선 시멘트 냄새가 맡아졌다. 비릿한 피비린내가 섞인 듯한 음산한 바람이 한차례불어 오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느낌, 느낌에게 사람들은 흔히 무방비 상태에 있을 때 급습 당하기 일쑤이듯 나는 머리칼을 잡아당기는 보이지 않는 힘에 눌려 저항하듯 그대로 앉아 손사래를 쳤다.

혼령이시나요. 그대는 진정 그런가요? 저의 살갗에 소름을 돋구어 댈 정도로 할 말이 많은 건가요? 한 시간 후에 전 떠나요. 광주를 떠나야 해요. 내가 사는 곳으로 가서 거실 한 귀퉁이에 여행가방 내려놓고 사진을 정리해야 하거든요. 한 시간 만이에요.

우리에게 주어진 한시간 동안 5.18 공원엔 가느다란 비가 내렸다.
"얘들아, 너희들 저 들판 저 키 큰 나무 밑에 노란 꽃이 무슨 꽃이게?"
평소 들로 산으로 끌고 다니며 야생화를 보여 주었던 우리 아이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혹시, 꽃다지 아니에요?"
"맞아."
"그런데 왜 저렇게 크지?"
"광주라서 그래."

신빙성 없는 대답이었다. 짐작일 뿐, 춘천에서 보지 못한 웃자란 키 큰 꽃다지를 꺾어 비엔날레 안내 책 자 갈피에 넣었다. 마치 떠돌던 혼령 하나가 따라와 책 속에 편안히 누운 듯 책이 봉분처럼 봉긋하게 부풀었다.

머리칼을 잡아당기는 보이지 않는 힘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우리는 말 이어가기를 했다. 여행 중에 보았거나 느꼈거나 꼭 기억하고 싶은 것 돌아가면서 말하기였다.
커다란 신발, 그 안에서 자고 싶었어요.
자동차 침실, 하루종일 빈둥거리기 안성맞춤인 장소라고 생각해요.
중국인 거리, 중국 짜장면은 우리랑 다르대요.

아까 엄마는 컴퓨터 앞에 앉아 사랑하는 사람에게 메일 보냈다.
나를 그려준 화가 아저씨.......... 아이들은 어느새 잠이 들었고 나는 어두운 창밖에 시선을 두고 더 많은 기억을 오래도록 하고 싶은 욕심이 조금씩 커지는 마음을 그대로 두었다.

광주를 다녀 온지 두 달이 흘러간다. 원 없이 찍었던 사진과 책갈피 속에 넣어 둔 꽃다지는 앨범으로 옮겨졌고 아이의 초상화는 벽에 걸려 있다. 책과 그림이 널려 있는 거실에 들어서며 큰 아이는 이런 말을 한다. '우리 집이 설치 미술이다.'

다음, 참 난 다음을 믿지 않지. 그러나 다음에도 우린 광주에 갈 거라는 것을 나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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