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37회]-창의사 김천일 등, 진주성에서 순절하다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37회]-창의사 김천일 등, 진주성에서 순절하다
  •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5.15 21: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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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 5월말 경에 10만 여명의 왜군이 부산에 모여들었다.
이는 또 다른 재앙을 잉태하고 있었다.
왜군들은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한 것이 아니라 진주성 공격을 준비한 것이다.

진주성 촉석문
진주성 촉석문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진 것은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당초 왜군의 전략은 현지에서 군량을 확보해 전쟁을 치른다는 계획이었는데 전라도를 점령하지 못하자 군량 조달에 큰 차질이 생긴 것이다.

이런 차질에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 1592년 10월에 치른 제1차 진주성 싸움에서의 패배였다.
2만 명의 왜군이 김시민이 이끄는 3,800명의 조선군에게 대패해 호남 공략이 저지된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진주성을 점령하도록 명령했다. 그는 2월부터 5월 사이에 세 차례나 명령서를 보냈다.
그러면 5월에 히데요시가 보낸 세 번째 작전지시서를 읽어 보자.

“목사성(일본은 진주목사 김시민 때문에 패전해 이 성을 목사성이라 불렀다) 공략은 흙주머니와 죽창을 만들도록 명하고 부상자가 나오지 않도록 할 것이며, 한 명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죽일 것. 그렇게 한 후에 전라도로 출진해서 승리하도록 할 것. 전라도를 완전 토벌 한 후, 성들을 견고하게 만들고 군사의 다소에 따라 성의 크기를 결정하고 각자 소유할 것.”

일본 입장에서 보면 진주성 공격은 임진년의 참패로 저하된 왜군의 사기를 높일 수 있는 기회였다.
진주성을 빼앗으면 호남을 공략할 수 있고, 보다 유리한 강화교섭 여건도 마련할 수 있었다.

왜군은 히데요시의 명령에 따라 진주성 전투를 준비했다. 왜군은 제1대에서 제6대까지 편성했고 병력은 도합 10여만 명이었다. 1대는 2만5천600명으로 가토와 구로다가 맡았고, 2대는 2만6천200명으로 고니시가, 3대는 1만8천800명으로 우키다가 지휘했다.
4대는 모리가 이끄는 1만3천600명, 5대는 고바야카와의 군대 8천700명이었다. 6대는 보조 병력이었고, 수군도 합류했다.

왜군의 움직임이 명군에 알려지자, 경락 송응창은 고니시를 따라 부산까지 간 심유경을 꾸짖었다.
당황한 심유경은 고니시에게 항의했으나 고니시는 가토 기요마사가 한 일이라고 시치미를 뗀 다음 진주성을 비우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엄포를 놓았다.

이윽고 선산에서 도원수 김명원을 만난 심유경은 진주성을 비우는 것이 상책이라고 말했다.
마치 고니시의 대변인 같다.

그러면 당시에 명군과 조선군의 상황은 어떠했을까. 명군 총병 유정은 유격 오유충과 더불어 대구에 있었고, 참장 낙상지와 유격 송대빈은 남원에, 유격 왕필적은 상주에 있었다.

왜군을 추격해 영남으로 내려 온 조선군은 창녕, 의령 등에 포진했다. 도원수 김명원은 선산에, 순변사 이빈은 의령에 주둔했고, 전라병사 선거이, 충청병사 황진, 전라방어사 이복남 등도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왔으며 전라순찰사 권율도 창녕에 있었다.

왜군의 공격 징후가 농후해지자, 도원수 김명원은 급히 장수들을 의령에 집결시켰다.
권율, 선거이, 이복남, 황진, 최경회, 고언백, 정명세, 이종인등 관군과 김천일, 고종후, 곽재우 등 의병장들이 의령에 모였다.

먼저 김천일이 진주성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장수들은 고개를 돌렸다. 명나라가 성을 비우자는 입장이고 조선 조정도 성을 비우는 것에 동조하고 있으며, 더구나 왜군이 30만 명이라는 소문에 싸울 엄두가 안 난 것이다.

이러자 김천일이 ‘나 혼자라도 진주성을 지키겠다’고 다시 나섰다.
이런 김천일의 충심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장수들은 물러갔다.
권율, 이복남 등은 운봉으로 후퇴했고 순변사 이빈은 산음으로, 의병장 곽재우도 창녕으로 돌아갔다. 여러 장수들은 뿔뿔이 흩어져 가버렸다.

안타까운 일은 경상우도감사 김성일이 4월 29일에 전염병(콜레라로 추정됨)으로 진주성에서 죽은 점이다. 그는 죽으면서 누이의 아들 유복립에게 ‘진주성을 반드시 지키라’고 유언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김천일과 같이 진주성을 지키고자 하는 의로운 장수들도 있었다. 충청병사 황진과 경상우병사 최경회, 복수의병장 고종후 등 주로 호남 장수들이었다.

그러면 전라순찰사 권율 등이 이끄는 관군과 곽재우의 영남 의병도 포기한 진주성을 왜 호남의병들이 지키려 했을까.
그 이유는 호남과 진주가 입술과 이빨의 관계이고, 진주가 무너지면 호남도 무너진다는 신념때문이었다.

한편 명나라 이여송은 장수 유정·오유충 등에게 명령해 군사를 전진시켜 진주성을 구원하게 했다. 하지만 명나라 장수들은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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