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36회]-나대용, 외교활동을 하다.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36회]-나대용, 외교활동을 하다.
  •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23.05.11 02: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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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 5월 17일에 영남 우수사가 군관을 보내왔다.
가져온 진주의 급보를 보니 명나라 제독 이여송이 지금 충주에 머무르고 있고 왜적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분탕질 치고 있다 하였다.

나대용 묘소 (나주시 문평면 대도리)
나대용 묘소 (나주시 문평면 대도리)

이순신은 분통했다.
이후 이순신은 왜군 동향을 계속 주시 하였다.

5월 21일 새벽에 조선함대는 10여 일 머무르던 견내량을 떠나 유자도로 진을 옮겼다. 오후에 정찰병이 적의 출몰이 여전하다고 이순신에게 보고했다.

5월 22일 아침 늦게 나대용이 본영(전라좌수영 여수)에서 왔는데 명나라 경략 송응창의 패문을 가지고 왔다. 송응창이 보낸 관원이 본도 도사, 행상호군, 선전관 한 사람과 같이 온다는 통지문을 가지고 왔다.
곧 우후에게 영접하도록 내보냈다. 오후에 칠천량으로 옮겨 배를 대고, 접대의 예를 문의할 일로 나대용을 내보냈다. 저녁에 방답첨사가 와서 명나라 사람 접대하는 일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비가 하루 내내 왔다.

23일에 이순신은 전라병사 선거이의 편지 및 공문을 받았다. ‘창원에 있는 적을 치고 싶으나 적의 형세가 거세기 때문에 경솔히 나아갈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저녁에 아들 회가 와서 명나라 관원이 본영에서 배를 타고 올 것이라고 전했다.

5월 24일
비가 오락가락하였다.
아침에 진을 거제 앞 칠천량 바다 어귀로 옮겼다. 나대용이 사량 (통영시 원량면 양지리) 뒷 바다에서 명나라 관원을 발견하고 먼저 와서, 명나라 관원과 통사(통역관) 표헌(表憲)과 선전관 목광흠이 같이 온다고 전하였다.

오후 2시경에 명나라 관원 양보(楊甫)가 진 앞에 당도하였다.
우별도장 이설을 마중 보내어 배까지 데려왔더니 매우 기뻐하였다.
이순신은 이들을 지휘선에 오르기를 청하여 명 황제의 은혜를 재삼 사례하고 마주 앉기를 청하니, 굳이 사양하면서 앉지 않고 선 채로 한 시간이 넘도록 이야기하며 수군의 강성함을 칭찬하는 것이었다.
예물단자를 바치니 처음에는 굳이 사양하는 듯 하다가 받고는 무척 기뻐하면서 재삼 고맙다고 하였다.

25일에 명나라 관원과 선전관은 술이 많이 취하여 덜 깬 듯 하였다. 이순신은 아침에 통역관 표헌을 불러서 명나라 장수가 하는 말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랬더니 표헌은 명나라 장수의 속뜻은 알 수 없으나, 다만 왜적을 쫓아 보내려고 한다고 하였다.

송경략이 우리 수군의 허실을 알아보려고 그가 거느리는 부하 가운데 정탐의 일을 맡은 양보(楊甫)를 보낸 것인데, 수군의 위세가 이렇게 대단하니 기쁘기 그지 없다고 하였다 한다.
늦게 명나라 관원은 본영으로 돌아갔다.

초저녁이 지나서 경상도에서 온 명나라 사람 2명, 경상우도 관찰사의 영리 1명, 접반사 군관 1명이 진문에 도착하였으나, 밤이 깊어 들이지 않았다.

5월 26일
아침에 명나라 사람을 만나보니 절강의 포수 왕경득이라고 하였다.

글자는 조금 알아서 한참 동안 대화했으나 알아듣지 못하여 매우 한탄스러웠다. 이처럼 명나라 관원들이 여러 명 수시로 드나들고 있다.

5월 27일에 이순신은 선거이의 편지를 받았다. “오늘 창원의 적들을 토벌하려고 했는데 궂은 비가 개지 않아 나아가지 못했다”는 내용이었다.

여기에서 선전관 이춘영이 전라좌수영에 와서 조정에 보고한 영남 왜적의 동향을 살펴보자. 1593년 5월 22일자 『선조실록』에 나와 있다.

“전하여 듣건대, 영남의 왜적은 문경·함창·상주·선산·김해·창원·웅천 등에 주둔해 있고 일본에서 새로 도착한 왜적은 가덕항(加德項)에 정박해 있으며, 인동·대구·밀양·청도·동래·부산 등지에서는 적진이 그대로 있다고 합니다.
또 양산과 대저도(大渚島)의 적은 곡식을 구하여 종자를 파종했다고 합니다.
4월 29일 경상우도의 감사 김성일이 죽었고 3월 11일에는 경상우병사 김면이 죽었는데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하며, 중위장(中衛將) 김영남이 그 군사를 대신 지휘하고 있다 합니다.(후략).”

6월 1일에 기다리던 충청수군이 도착하였다. 나대용도 본영에서 왔다.

이 날의 『‘난중일기』를 읽어보자.
“아침에 탐후선(探候船)이 들어왔다. 어머니 편지도 왔는데 평안하시다니 매우 다행스럽다. 아들의 편지와 조카 봉의 편지도 함께 왔다. 그 편지에 적혀있기를 ‘명나라 관원 양보가 왜인의 물건을 보고 기뻐 어쩔 줄 모르더니 말 안장 하나를 가지고 갔다’고 한다.

탐후선이 왜인의 물건을 가지고 왔다. 충청수사 정걸이 왔다. 나대용, 김인문, 방응원과 조카 봉도 왔는데 어머님이 평안하시다고 한다. 매우 다행스러웠다. ”

6월 8일
탐후선이 왔다.
나대용이 병이 나서 본영(전라좌수영 여수)으로 돌아갔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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