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대첩과 안골포 해전은 임진왜란의 흐름을 바꾼 전투였다.
조선 수군이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함으로서 일본 수군의 서해 진출은 무산되었다.
일본 언론인이자 군국주의 괴벨스인 도쿠토미 소호(1863~1957, 본명은 도쿠토미 이이치로)는 1920년 9월1일부터 1921년 7월5일까지 신문에 연재한 『근세일본국민사』에서 “한산 해전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조선정벌에 사망 선고를 내린 해전이다.”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한산해전에서의 패배로 일본군은 제해권을 상실했고, 육전에서도 일본군이 허송세월을 보내게 되었으며 평양까지 진격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진퇴양난에 빠지게 되었다.”고 평했다.
류성룡은 『징비록(懲毖錄)』에서 한산대첩을 이렇게 평가했다.
“이에 앞서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평양에 도착하여 ‘일본 수군이 10만명이 지금 또 서해를 통하여 오고 있는데 어가는 또 어디로 가시렵니까?’라는 글을 보낸 적이 있었다. 왜군은 원래 육군과 수군이 합세하여 서쪽으로 진격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이 한 번 해전에서의 패배로 왜군의 한쪽 팔이 끊어져 버렸다.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가 비록 평양을 빼앗았다고는 하나 그 형세가 외롭게 되어 더 진군하지 못하였다. 이 해전으로 전라·충청도를 보전하였고, 나아가서 황해도와 평안도의 연해지역 일대까지 지켜냄으로써 군량을 조달하고 조정의 명령이 통하여 중흥할 수 있었다.
또한 요동의 금주·복주·해주·개주·천진 등지가 전쟁에 휘말리지 않아서, 명나라 군대가 육로를 통하여 구원하려 와 왜적을 물리친 것 또한 이 한번의 전투 때문이었다.
아아, 이것이 어찌 하늘의 도움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이순신은 3도의 수군을 이끌고 한산도에 주둔하여 왜적이 서쪽으로 침범하는 길을 끊었다.”(류성룡 저·김시덕 역해, 교감·해설 징비록, 2013, p 313-314)
한편 아시아 해양 역사에 조예가 깊었던 영국 해군 제독 조지 알렉산더 발라드(1862-1948)는 1921년에 출판한 그의 저서 『일본 정치 역사에 미친 바다의 영향』에서 한산해전을 이렇게 평가했다.
“이 해전으로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려던 야망은 급속히 꺼져갔다. 그것은 위대한 조선 제독 이순신이 세운 빛나는 전공 때문이었다.
불과 6주일이라는 짧은 기간에 그는 전 세계 해전 사상 일찍이 그 전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연전연승의 공을 세웠다. 넬슨, 블레이크, 장바르라 할지라도 이순신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없었다. ”
또한 파란 눈의 애국자 호머 헐버트(1863-1949)는 1906년에 발간한 저서 『대한제국 멸망사』 ‘제6장 조선의 황금기와 임진왜란’에서 이렇게 적었다.
“이순신은 자신이 만든 철갑선을 타고 왜적과 교전했다. 그는 거북선으로 왜선의 좌우를 협공해 전 함대를 거의 격파했다. ... 이순신 장군의 승리는 임진왜란의 전환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때부터 왜의 침략 야욕이 좌절되었기 때문이다.”(헐버트 지음·신복룡 역주, 대한제국 멸망사, 2019, p 122-123)
한편 1943년 4월 22일 미국 상원의원 알렉산더 와일리는 상원에서 아래와 같이 연설했다.
“세계에서 일본을 나라는 조선 뿐입니다.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여러 번 전쟁이 있었는데, 1592년에 조선 해군 대장 이순신이 철갑선을 처음으로 만들어 일본 해군을 함몰시켰습니다. 그 뒤 조선은 360년 동안을 무사히 지냈습니다. ”
미국에서 발행된 한인 교포신문 ‘국민보’ 1943년 6월 2일자에는 와일리 상원의원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미국이 승인해야 한다고 연설한 내용이 실려있다.
1943년은 태평양 전쟁이 한창인 때였다.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일본 전투기 360여 대가 하와이 진주만의 미 해군기지를 기습 폭격했다. 미국은 즉시 일본에 선전 포고했다. 미국의 참전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유럽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전선도 아시아 전체로 확대되었다.
태평양 전쟁 초반 전세는 일본에게 유리했다.
일본은 말레이 반도, 필리핀, 인도네시아를 점령했다. 그런데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을 전환점으로 전세가 바뀌었다. 이후 일본은 패망의 길을 걸었다.
영국의 한 저널리스트는 ‘일본의 미드웨이 해전 패배는 16세기 조선의 이순신 장군에게 당한 패전 이후 일본의 첫 패전’이라고 평했다.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