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 -[15회] 당포 해전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 -[15회] 당포 해전
  • 김세곤 역사 칼럼니스트
  • 승인 2022.10.20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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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북선이 처음 출전한 1592년 5월 29일의 사천해전에서 이순신의 대솔 군관 훈련봉사 나대용은 왼쪽 다리에 탄환을 맞았고 군관 이설도 화살을 맞았다. 이순신도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아 등을 관통하였다.
전투가 끝난 뒤 이순신은 사람을 시켜 칼끝으로 살을 쪼개고 탄환을 꺼내니 깊이가 두 치(약 6cm)나 되었다.

조선의 군선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 전시)<br>
조선의 군선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 전시)

온 군중이 비로소 알고 경악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이순신은 태연하게 웃으며 주위를 안심시켰다.

6월 1일에 이순신은 함대를 고성 땅 사량도로 이동하여 정박하고 군사를 쉬게 했다. 이튿날 오전 8시경에 이순신은 ‘왜선들이 당포 선창에 정박하고 있다’는 척후선의 보고에 따라 함선을 즉시 출발시켜 10시쯤 당포 앞바다에 도착하였다.

당포 선창에는 약 300여 명의 왜적이 있었는데, 그중 절반은 성안에서 분탕질하고 있었고, 나머지 반은 성 밖의 험한 지형에서 조총을 쏘며 대항했다. 정박 왜선은 대선 9척과 중간 배와 작은 배 12척으로 모두 21척이었다.

그 중에 대선 한 척은 높이가 6~7미터 정도 되는 높은 누각이 있었는데, 그 주위로는 붉은 비단 휘장을 둘렀고, 휘장 사면에는‘황(黃)’자를 크게 써 놓았다. 왜장은 일산(日傘 햇볕을 가리기 위해 세우는 큰 양산)을 쓰고 있었는데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이번에도 이순신은 거북선이 선두에 나서 왜장이 탄 대선을 공격하여 왜군을 교란시킨 뒤 이어서 판옥선이 일제히 화포를 쏘아대는 전술을 구사했다.

거북선은 왜장이 탄 누각 대선 아래를 파고들면서 용머리에서 현자총통을 먼저 쏘았다. 이어서 천자·지자총통과 대장군전(大將軍箭)을 쏘아 누각대선을 깨뜨리기 시작하였다. 대장군전은 한마디로 말해 ‘대포의 철환’이다. 창끝같이 큰 활촉에 쇠 날개까지 붙은 대형 화살로 돗대가 맞으면 두 동강나는 대단한 위력을 가진 무기였다.

거북선의 1차 공격이 끝나자 이번에는 아군 장수들이 탄 판옥선이 일제히 철환과 편전 및 승자총통 등을 쏘았다. 중위장 순천부사 권준이 활로 왜장을 쏘아 가슴을 맞추자, 왜장이 층루에서 떨어졌다. 이러자 척후장 사도첨사 김완과 군관 흥양보인 진무성이 배로 뛰어 올라가서 왜장의 목을 베었다.

이어서 조선 수군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포탄과 화살을 쏘아대니 왜적들은 겁내어 도망쳤고, 물에 빠져 헤아릴 수 없이 죽었다. 사기가 오른 군사들은 왜선 21척을 모두 불살랐다. 이어서 조선수군들은 상륙하여 왜군을 끝까지 추격하려 했다.

바로 이때 외양(外洋)에 파견해 두었던 탐망선으로부터 급보가 전해졌다.
“왜군 대선 20여 척이 다수의 작은 배들을 거느리고 거제도로부터 이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 (현충사)
충무공 이순신 기념관 (현충사)

이에 이순신은 육지의 추격 작전을 중지하고 모든 전선을 외양으로 이동케 하였다. 그때 당포로 향하던 왜선들은 불과 2km 정도의 거리에서 이순신 함대를 발견하였는데, 왜군 함대는 그 순간부터 도망치느라 분주하였다.
이순신 함대는 이들을 추격하였지만 날이 저물어 더이상 추격을 하지 않고, 진주 땅 창신도(昌新島 남해군 창선면 창선도)로 이동하여 밤을 지샜다.

이 날 밤에 좌별도장인 우후 이몽구가 대장선을 수색하여 발견한 금부처를 이순신에게 바쳤다. 옻칠한 갑 속에 든 금부채에는 한쪽 중앙에 ‘유월 팔일 수길(六月八日 秀吉)’이라 서명하였고, 오른편에는 우시축전수(羽柴筑前守)라는 다섯 글자가, 왼편에는 구정유구수전(龜井琉求守殿)이란 여섯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순신은 ‘당포파왜병장’ 장계에서 금부채는 수길이가 축전수에게 부신(符信)으로 보냈을 것이라고 보고했다.

여기에서 축전수(筑前守)는 히데요시가 주군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로부터 받은 관직으로 이때의 성명은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였다. 따라서 수길(히데요시)이가 우시축전수(羽柴筑前守)인데, 이순신은 수길과 축전수가 딴 사람으로 알았다.

그런데 이 금부채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1536~1598)가 1582년에 가메이 코레노리(亀井茲矩 1557~1612) 류큐(琉求) 영주에게 준 것이었다. ,
                                                                     <김세곤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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