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오네
가을이 오네
  • 시민의소리
  • 승인 2022.08.31 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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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과일들이 다른 해보다 더 풍성하게 열렸다고 한다. 전해오는 말로는 과일이 대풍이 드는 해가 몇년 만에 한번씩 온다는데 내가 듣기로 그 해는 인간 세상에 흉년이 들고 과일들은 반대로 풍년이 든다는 것이다.

자연의 오묘한 이법이라고나 할까. 자연은 세상사를 모르는 척하고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품 안에 기르는 모든 생명체를 거두려고 알아서 다 보살피는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엄숙한 깨달음이 있다면 자연의 신비와 경이가 자신이 낸 생명들을 놀랍게도 지켜내는 일에 길쌈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연은 가까이서 대하면 냉랭하고 엄숙해 보이지만 멀리서 보면 지극히 자애롭고 헌신적이다.

자연이 우리에게 현시하는 장면은 계절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특히 가을은 한해의 대단원을 마감하는 성취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만물이 새로 시작하는 봄부터 뜨거운 햇볕으로 실과를 키우고 달구는 무성한 여름을 거쳐 마지막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릴케) 가을에 와서야 다 이룬다. 영어에서는 가을을 Fall이라고도 한다. 낙하한다는 것이다. 나뭇가지마다 익은 과실들이 툭, 툭, 떨어지는 계절이라는 뜻이다.

우리 전라도에서는 가을을 ‘가슬’이라고 한다. 다 익은 곡식과 과일과 채소들을 두 팔로 추수하는 계절이란 뜻이다. 떨어지는 것은 자연이 하는 일이고 거두어들이는 것은 인간이 하는 일이다. 묘하게도 가을을 두고도 서양과 동양은 이처럼 인식이 다르다.

폭염, 태풍, 가뭄으로 혹독한 여름치레를 한 지난 계절은 이제 저 산마루를 넘어가고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대선사 탄허 큰스님은 ‘동지 때부터 하늘의 기운이 땅으로 내려와 여름이 시작되고 하지 때부터 땅의 기운이 하늘로 퍼져 올라가 겨울이 시작된다’고 설했다.

그 소식대로라면 이제 가을은 겨울로 가는 초입에 들어서는 것이다. 추위와 침묵의 계절인 겨울이 오기 전에 대자연은 수확의 계절을 앞에다 놓아두었다. 곳간에 가슬한 것들을 쟁여 놓고 겨울을 지내라는 것이다.

시인 릴케는 지난 여름은 위대했다고 노래하지만 다가오는 가을 또한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 가을이 와서 모든 생명체들은 여름이 키운 것을 익게 하고, 완성케 하는, 가을이야말로 한해의 결론인 것이다.

나는 가끔 생각해 본다. 일 년에 사시사철이 있는 것은 대자연의 수억 년에 걸친 내력을 짧게 보여주는 것이고, 인간의 일생을 은유하는 것이라고. 그렇게 보면 사십이 불혹이고, 오십이 지천명이라면 바로 오십부터가 가을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

떨어진 것을 거두어들이는 작업은 하늘의 뜻을 행하는 가장 아름다운 서사로 보여진다. 만일 사계절 가운데 가을이 없다면, 하고 생각해보면 가을의 위치를 분명히 알아차릴 수 있다. 사계절은 가을을 위하여 정렬해 있다. 가을은 모든 희망과 바람에 여물어 응답한다. 모든 질문은 가을에 도달하여 끝난다.

사람에게도 생의 가을에 들어서면 질풍노도의 열정과 방황의 끝이 보인다. 사람의 일생에도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이 있는 것이다. 생각할수록 놀라운 일이다. 사람은 태어나 성숙해가고 결실을 맺고 그리고 긴 휴식을 맞이한다.

하늘과 땅이 합작하여 일구는 사업은 이처럼 자연은 물론 인간에게도 섭리로 적용한다. 이것이야말로 대자연의 신비와 경이가 빚어내는 대공사가 아니고 무엇이라 할 것인가.

내 삶이 거둘 것이 별로 없는 흉년 같은 일생이라면 나는 어이할 것인가. 때를 놓쳐 과일처럼 풍년이 드는 쪽을 선택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인생을 대충 살아온 사람은 죽음이 큰 문제가 될 것이고, 인생을 알차게 살아온 사람은 죽음이 홀가분할 것이다’라고 내가 자주 인용하는 말은 가을을 두고 고독하게 새겨들어볼 말이다.

가을이 오면 내 안에 대풍을 거두는 한해가 되기를 무릎 꿇고 기도하고 싶다. 아, 가을이 온다. 갈가마귀떼가 높아진 하늘을 날아온다. 내 안에도 가득 채워주시는 계절이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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