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 - 1회 임진왜란, 동아시아판 세계대전
충무공 이순신과 거북선 - 1회 임진왜란, 동아시아판 세계대전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역사 칼럼니스트, ‘임진왜란과 호남사람들’ 저자)
  • 승인 2022.06.27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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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조선을 고통과 혼란의 소용돌이로 만든 ‘동아시아판 세계 대전’이었다. 조선왕조는 1392년 건국 이래 큰 외침 없이 2백 년간 태평 시대를 누렸다. 그런데 100년간의 전국(戰國)시대를 끝내고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는 1592년 4월 13일에 명나라를 친다는 명목으로 조선을 침략했다. 이는 해양세력의 대륙세력에 대한 최초의 도전이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 (서울 광화문)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 (서울 광화문)

임진왜란은 예고된 전쟁이었다. 미리 대비할 수 있었지만 선조의 무능과 당파싸움, 그리고 장수들의 오만이 조선을 아비규환으로 만들었다.

1589년 8월에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宗義智)는 선조에게 통신사 파견을 요청하면서 조총(鳥銃)을 바쳤다. 선조는 조총을 군기시(軍器寺)에 보관토록 지시했다. 선조는 1543년에 포르투갈로부터 건너온 혁신 무기엔 전혀 관심이 없었다.

1591년 3월에 선조는 일본을 다녀온 조선통신사를 접견했다. 그런데 정사(正使) 황윤길과 부사(副使) 김성일은 선조에게 엇갈린 보고를 했다. 황윤길은 ‘필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이다’라고 아뢰었고, 김성일은 ‘그러한 징후는 발견하지 못했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된다’고 말했다.

선조가 ‘풍신수길이 어떻게 생겼던가?’라고 묻자, 황윤길은 ‘눈빛이 반짝반짝해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것 같다’고 말했고, 김성일은 ‘그의 눈은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 할 위인이 못 된다’고 일축했다.

이러자 조정은 논란에 휩싸였다. 대세는 집권당인 동인의 김성일에게 기울었다. 선조는‘전쟁 없음’으로 결론내렸다.

1592년 4월 13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왜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했다.

4월 28일에 충주 탄금대에서 배수진을 친 신립이 전사하자, 선조는 30일 새벽에 폭우를 맞으며 한양을 버리고 북으로 도망쳤다. 성난 백성들은 장예원의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경복궁과 창덕궁에 불을 질렀다. 5월 3일 왜군은 한양에 무혈 입성했다. 왜군이 침략한 지 20일 만이었다.

6월 22일에 압록강 근처 의주에 도착한 선조는 요동으로 망명하려 했고,

신하들만 탓했다. 이때 조선은 전라도를 제외한 7도가 왜군 손아귀에 있었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나라를 구한 것은 전라좌수사이순신(1545~1598)이 이끄는 조선 수군과 전라도 사람들이었다.

1591년 2월 13일에 선조는 이순신을 정읍현감에서 전라좌수사로 임명하였다. 종6품에서 정3품으로 7계단 뛰어넘은 파격 승진이었다. 그런데 사흘 뒤인 2월 16일에 사간원이 이순신의 파격 승진을 문제 삼았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을 관직을 뛰어 넘어 제수하시니 인재가 모자란 탓이긴 하지만 관작의 남용이 너무 심합니다. 체차시키소서.”

선조는 답하였다.

“이순신의 일은 나도 안다. 다만 지금은 상규에 구애될 수 없다. 그 사람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 다시 논하지 말라.”

2월 18일에도 사간원은 이순신의 체차를 청했다. 그러나 선조는 단호했다. 이렇게 이순신의 전라좌수사 임명은 일단락되었다.

이후 이순신은 혹시 모를 전란에 착실히 대비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하루 전인 1492년 4월 12일에 거북선이 건조되었다. 거북선은 조선의 주력 전투함 판옥선을 보완하기 위해 만든 돌격선이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인 ‘난중일기’에 나온다.

4월 12일 맑음

아침밥을 먹은 후 배를 타고 거북선에서 지자포(地字砲)와 현자포(玄字砲)를 쏘아보았다.

5월 초에 경상우수사 원균이 이순신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전라도 수군이 경상도까지 나가서 싸워야 하는지에 대한 격론 끝에, 이순신은 5월 4일 여수를 떠나 거제도로 향했다.

5월 7일에 이순신은 거제도 옥포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을 만났다. 그는 전투에 앞서 이렇게 명령했다.

“함부로 가볍게 움직이지 말고, 태산같이 조용하고 무겁게 행동하라. (勿令妄動 靜重如山).”

그리하여 화포와 당파전술로 왜선 26척을 분멸시켰다. 이 승리로 조선 수군은 자신감을 얻었다.

5월 29일에는 거북선이 사천해전에서 첫 출전한 가운데 당포·당항포 전투에서 연승했다.

7월 8일에 이순신은 한산도 해전에서 학익진으로 왜군을 대파했다. 이러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수군에 이순신과 싸우지 말도록 명령했다. 9월 1일에 이순신은 일본 수군 본영인 부산을 공격해 적선 100여 척을 불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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