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패로 망하다 (58) - 고종, 민왕후를 폐서인하다
조선, 부패로 망하다 (58) - 고종, 민왕후를 폐서인하다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2.01.10 08: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을미사변이 일어난 이틀 후인 1895년 8월 22일에 고종은 조령(詔令)을 내려 민왕후를 폐서인했다.

경복궁 건천궁 장안당
경복궁 건천궁 장안당

“짐(朕)이 보위(寶位)에 오른 지 32년에 다스림과 덕화가 널리 펴지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왕후 민씨가 그 친당을 끌어들여 짐의 주위에 배치하고 짐의 총명을 가리어 백성을 수탈하고 짐의 정령(政令)을 어지럽히며 벼슬을 팔아먹고 탐학이 지방에 퍼지니 도적이 사방에서 일어나서 종묘사직이 위태로워졌다. 짐이 그 죄악이 극대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처벌하지 못한 것은 짐이 밝지 못하기 때문이기는 하나 역시 그 패거리를 꺼려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짐이 이것을 억누르기 위해 지난해 12월에 종묘에 맹세하기를, ‘후빈(后嬪)과 종척(宗戚)이 나라 정사에 간섭함을 허락하지 않는다’해 민씨가 뉘우치기를 바랐다. 그러나 민씨는 구악(舊惡)을 고치지 않고 그 패거리와 보잘것없는 무리를 몰래 끌어들여 짐의 동정을 살피고 국무대신을 만나는 것을 방해하며, 또한 짐의 나라의 군사를 해산한다고 짐의 명령을 위조해 변란을 격발시켰다. 사변이 터지자 짐을 떠나고 그 몸을 피해 임오군란(1882년)의 지나간 일을 답습했으며 찾아도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왕후의 작위와 덕에 타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죄악이 차고 넘쳐 선왕(先王)들의 종묘를 받들 수 없는 것이다. 짐이 부득이 왕실의 옛 법을 삼가 본받아 왕후 민씨를 폐(廢)해 서인(庶人)으로 삼는다.” (고종실록 1895년 8월 22일)

민씨 척족들이 정권을 잡자 매관매직으로 백성을 수탈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특히 1882년 임오군란 때 민왕후가 청나라를 끌어들였고, 갑신정변 이후 원세개가 총독인 양 행세하며 내정간섭을 하였다. 1894년 4월에 전봉준의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하자 민왕후는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고자 청나라 군대를 끌여들였고, 이로서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이는 역사에 씻을 수 없는 민왕후의 잘못이다.

매천 황현(1855∽1910)은 ‘매천야록’에서 ‘왕비는 20년 동안 정치를 간섭하면서 나라를 망치게 해 천고에 없는 을미왜변을 당했다면서, 폐서인 조서가 비록 고종의 의견에서 나온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실상(實相)을 기록한 것’이라고 했다.

이윽고 외부대신 김윤식은 민왕후의 폐서인 사실을 각국 공사관에 알렸다. 이러자 알렌 미국 공사, 베베르 러시아 공사를 비롯한 몇몇 외교관들이 그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고종을 알현했다. 이때 고종은 거의 유폐 상태였다.

# 8월 22일에 ‘뉴욕 헤럴드’ 서울 특파원 코커릴 기자는 고종을 알현했다. 고종은 창백했다. 8월 23일에 영국 총영사 힐리어는 북경주재 영국 공사 오코너에게 왕비 시해 관련 사항을 보고했다. 여기에는 러시아인 사바틴의 증언도 포함되어 있었다.

8월 26일에 미국 대리공사 알렌과 러시아 공사 웨베르는 외부대신 김윤식이 보낸 문건에 의문을 제기하고 왕후 시해 사건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처벌을 권고하는 문서를 보냈다.

각국 외교관들은 일본이 왕후를 시해했다고 확신했다. 이럴 즈음에 『뉴욕 헤럴드』 서울 특파원 코커릴은 을미사변에 일본이 개입했다는 기사를 뉴욕 본사에 보냈다.

『뉴욕 헤럴드』의 특종 기사에 세계 각국은 경악했다. 유럽과 미국 등은 일본을 비난했고, 일본 내에서도 비판이 일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철저한 진상 규명과 연루자 처벌을 일본 정부에 촉구하기도 했다.

이러자 9월 1일에 미우라 일본 공사는 관련자 48명과 함께 소환되었고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히로시마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