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부패로 망하다 (20) - 고종, 최익현을 제주도에 위리안치하라 명하다.
조선, 부패로 망하다 (20) - 고종, 최익현을 제주도에 위리안치하라 명하다.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21.04.05 09: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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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3년 11월 5일에 영돈녕부사 홍순목, 좌의정 강로, 우의정 한계원은 다시 고종을 소견(召見)하였다.

창덕궁 희정당
창덕궁 희정당

이들은 최익현은 잠시도 용서할 수 없으니 빨리 처분을 내리라고 아뢰었지만, 고종은 묵묵부답이었다.

빈청으로 물러 나온 홍순목, 강로, 한계원은 빈계(賓啓)를 올렸다.

"신들은 간특하고 패악한 최익현을 잠시도 용서할 수 없다는 뜻으로 연석(筵席)에서 간절히 청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밤새 방황했는데 더욱 답답하고 안타까워 서로 이끌고 나와 다 드리지 못한 이야기를 아룁니다.

아! 최익현이 첫 번째 올린 상소문에서 이른바 ‘의리와 윤리를 무너뜨렸다.’라고 한 것은 결국 무슨 일을 가리킨 것입니까?

사람들의 시비가 격렬히 일어나 그의 흉악한 죄상을 규탄하자 또다시 감히 이것저것 장황히 끼워서 자신의 죄를 가리고 스스로 변명하면서 더욱 더 몹시 교활하고 간사하게 행동하였습니다.

만동묘를 철폐한 일은 대왕대비의 처분이라고 정중한 비지(批旨)를 내렸는데도 감히 윤리를 무너뜨렸다는 등의 말을 마구 하였으니 흉측한 심보와 반역 정상이, 아! 또한 참람됩니다.

말단의 어구에 망령되이 경전을 인용하여 자신의 말을 수식하였으며 그 말뜻을 음미하지 않고 두드러지게 가리키는 바가 있었는데 그가 핍박한 말이 간사한 흉계를 환히 꿰뚫어보는 전하의 식별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습니다.

오늘 전하를 섬기고 있는 조정의 신하들로서 그런 마음을 차마 속에 품을 수 있으며 그런 말을 글에다 실을 수 있습니까?

그가 말한 ‘의리와 윤리를 무너뜨렸다.’는 말은 바로 그 자신을 두고 한 말이니 어찌 최익현이 피할 수 없는 최상의 단안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그에게도 타고난 양심이 있다면 틀림없이 목을 늘이고 죽임을 당하여도 원망하거나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신들이 하는 말만이 아니라 온 조정 사람들의 말이며, 온 조정 사람들의 말만이 아니라 온 나라 사람들의 말이며, 온 나라 사람들의 말만이 아니라 천하 후세에 반드시 내려질 정론입니다.

신들의 짐작에는 전하가 이것에 대해 윤허를 망설이는 것은 대체로 언로 열고 간쟁을 받아들이는 것이 제왕들이 해야 할 성절(盛節)이니 갑자기 꺾어버리지 않으려고 그러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아무리 천지를 지탱할 수 있는 대의가 있고 귀신이나 성인께서 보장하시는 격언이 있다 해도 그것이 윤상(倫常)을 무너뜨리고 그럴 듯하게 수식하여 현혹시키는 말로 했다면 그 거짓을 명백히 분별하여 단호한 결단을 내리는 것도 제왕들이 해야 할 성절입니다.

더구나 그 음침한 심보가 필시 나라와 가정을 해치고야 말 것인데 전하께서는 무엇이 아까워서 신들이 피력하는 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처음에는 간언이 이르게 하려는 성스런 덕으로 포용하여 넉넉히 상을 주고 뒤에는 간사한 내막을 환히 분별하여 크게 분노하여 주벌한다면, 온 나라에 널리 공포되고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니 누구인들 봄볕처럼 생장시키고 가을서리처럼 죽이는 하늘처럼 사심이 없는 전하의 덕을 우러르지 않겠습니까?

이번에 이 역적의 목숨을 부지하게 한다면 이는 훌륭한 전하의 시대에 누(累)가 되고 필시 온 나라 사람들이 의혹을 품을 것입니다. 나아가서 후세의 비난을 받게 될 것이니, 어찌 두렵지 않으며 어찌 떨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전하는 깊이 생각하고 사람들의 요청에 따르시어 국청(鞫廳)을 설치하고 실정을 알아내어 전형(典刑)을 바르게 시행하여 강상(綱常)의 도리를 부지하고 나라의 법을 엄하게 하소서."

이에 고종은 "대신들의 요청이 이처럼 간절하니 어쩔 수 없이 아뢴 대로 시행하겠다."고 비답했다. (고종실록 1873년 11월 5일 3번째 기사)

고종은 마지못해 최익현의 추국을 윤허한 것이다.

이 날 부사과 조원조가 최익현을 속히 국문(鞫問)하라고 상소하였다. 흥선대원군의 형인 흥인군 이최응 등도 최익현을 죄주라고 하였고, 판의금부사 최우형과 지의금부사 박규수도 최익현을 빨리 추국(推鞫)하라고 아뢰었다. (고종실록 1873년 11월 5일 4-6번째 기사)

11월 8일에 고종은 최익현을 추국청을 설치하라고 전교하고 영돈녕부사 홍순목을 위관(委官)에 임명하였다.

그런데 11월 9일에 추국청이 최익현에 대하여 형장(刑杖)을 가할 것을 청하는 의계(議啓)를 올리자, 고종은 심문을 중지하고 제주목에 위리안치하도록 전교했다.

“공초를 보니, 당초의 상소 내용은 시골에 있는 무식한 사람이 전혀 분수를 모른 데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도 국청을 설치한 것은 일의 체모를 보존하기 위한 것이자 중론을 따른 것이었다. 달리 다시 심문할 만한 단서가 없으니 특별히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덕으로 제주목(濟州牧)에 위리안치(圍籬安置)하도록 하라.” (고종실록 1873년 11월 9일 2번째 기사)

이어서 고종은 "추국(推鞫)을 철파하라."고 전교했다.

(고종실록 1873년 11월 9일 4번째 기사)

고종의 전교는 너무 황당하다. 최익현을 감싸는 처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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