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식(虎食)
호식(虎食)
  • 시민의소리
  • 승인 2020.02.18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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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대흥사에 갔었다. 한참 옛날 일이다. 대흥사 두륜산 중턱에 있는 일지암이던가 하는 암자를 찾아갔다. 그 암자엔 어느 스님 한 분이 한국차를 연구하면서 마을 초등학교에 가서 차 강의도 하는 분이 거처하고 있었다.

그 분이 추사 김정희, 초의선사, 다산 정약용으로 이어지는 차에 얽힌 매우 귀한 스토리를 들려주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선(禪)과 다(茶)가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 다도가 선의 경지에 닿아 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그건 그렇고, 암자에서 그윽한 차 한 잔 대접을 받고 다선일미를 생각하며 산길을 내려오는 참에 갑자기 내 곁으로 서늘한 바람이 일었다. 무엇인가 후딱 스쳐 지나가길래 뒤돌아보니 머리가 허연 노파가 키보다 더 긴 지팽이를 짚고 조금 과장하면 바람처럼 가고 있었다.

깊은 산중에 지팽이를 짚고 마치 신령처럼 빠르게 멀어져가는 그 노파에게 본능적으로 소리질렀다. “여기요!” 그때 나는 기자 생활을 하고 있던 터라 보이는 것이 다 기사감으로 보이던 시절이었다.

그 노파 쪽으로 내가 걸어가서 보니 승복차림이어서 단박에 비구니임을 알아보았다. 그런데 무엇인가 범접할 수 없는 신령한 표정이었다. 80줄은 되어 보이는데 어찌 이리 빨리 산을 탈 수가 있을까. “이 산중에 혼자 어디 가시는 거예요?” 하고 말을 꺼냈다.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때 다른 이야기는 묻지 못했다. 너무 뜻밖의 상황인데다 긴 이야기를 나눌 형편이 못되었다. “혼자서 이렇게 산을 오르시다가 산짐승이라도 만나면 위험하시잖아요?” 내 말을 듣더니 그 선사같은 비구니 노스님은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호식은 타고 나는 것이지요.” 호식? 나는 그 노스님에게 되물었다.

“호식은 타고난다고요?” 나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노스님은 호식이라는 낯선 단어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호랑이에 잡혀먹을 운 같은 것은 애시 당초 타고 난다는 이야기다. 산에서 호랑이가 없어진 지 오랜데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그 신령스런 얼굴을 한 스님은 속세를 초월한 표정으로 내게 덧붙여 설명을 해주었다.

“요새는 자동차 같은 것이 호랑이지요”라고 말했다. 호랑이는 사라졌지만 자동차가 호랑이나 같다는 것이다. 순간, 나는 아닌 말로 득도할 뻔했다. 수행 정진 중인 사람이었다면 눈에서 비늘이 떨어질 장면이다.

당시 연간 자동차에 치어 죽는 사람이 3천명이 넘어갔다. 과연 호식이라는 말이 절묘하게 들리는 순간이었다. 하기는 자동차 모양이 짐승 비슷한 데가 있긴 하다.

물론 그 득도한 듯한 얼굴을 한 노스님이 자동차 사고로 죽은 사람들에게 ‘당신은 사고로 죽을 운명을 타고 났다’라고 규정하는 것이 아니란 것쯤은 나도 안다. 세상만사에는 자기 뜻과는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이 있다는 말일 것이다. 더 나아가서 말하면 인간에게는 궁극적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대흥사 두륜산에서 우연히 만난 노스님한테서 나는 호식이라는 화두를 얻은 셈이다. 인간은 완전체가 아니므로 종당에는 인력으로 넘어설 수 없는 경지가 있다. 그러니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 이렇게 생각을 정리해두었다.

조선시대의 전설이나 일화들에는 호랑이가 자주 등장한다. 대개 호랑이는 영험한 동물로 나온다. 호랑이가 사람을 물어가는 장면이 지당한 모습으로 묘사되어 있다. 마치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처럼.

내게 호식을 일러주고는 노스님은 발걸음을 돌려 몇 걸음 걸어가는 것 같았는데 금새 울창한 나무숲 사이로 사라지고 보이지 않았다. 두륜산 봉우리로 흰구름이라도 보러 가는 것이었을까. 잠깐 무엇에 홀린 듯 나는 환상이라도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호식이라, 나는 그 후로 이 한마디를 잊지 않고 가끔 뇌리에 떠올리곤 한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호식이 있으니 부디 나를 운명 앞에 낮춰 세우라. 꼭 그래서는 아니겠지만 나이가 들면서부터는 혼자 노는 방법에 익숙해져 있다. 내세울 것도 시샘할 것도 없이 묻혀 사는 것이 딱 맞는 허리띠처럼 편할 때가 많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자연이라는 것도 비유컨대 그 노스님이 말한 호랑이가 아닌가싶다. 자연은 배가 고프면 전설 속의 호랑이처럼 사람을 물어간다. 시간 너머로 종적도 없이 말이다. 모든 사람은 호식을 타고 난다. 그것을 운이라고 해도 좋겠다.

삶의 실상은 운으로 짜여진 비단 같은 데에다 자수를 놓는 것이다. 우한 신종 코로나(코로나19) 때문에 오래 집안에서 지내다보니 먼 옛날 대흥사 암자에 같던 일이 나를 달래려고 떠올랐는가보다. 설마 코로나 바이러스가 신종 호랑이는 아니겠지. 무등산 춘설차 한 잔으로 세월에 부대끼는 마음을 건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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