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호남 선비, 시조문학의 최고봉 고산 윤선도(14)
길 위의 호남 선비, 시조문학의 최고봉 고산 윤선도(14)
  • 김세곤 호남역사연구원장
  • 승인 2018.06.18 09: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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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8년에 함경도 경원 유배지에서 윤선도는 시조 두 수를 짓는다. 처녀작 ‘견회요(遣懷謠)’, ‘우후요(雨後謠)’가 그것이다.

먼저 ‘시름의 노래’(견회요 遣懷謠) 시조 5수를 음미해보자.1)

슬프나 즐거우나, 옳다 하나 그르다 하나,

내 몸의 할 일만 닦고 닦을 뿐이언정,

그 밖의 여남은 일이야 분별할 줄 있으랴.

 

내 일 망령된 줄을 내라 하여 모를손가.

이 마음 어리석기도 임을 위한 탓이로세.

누가 아무리 말하여도 임이 생각해 보소서.

 

경원 진호루 밖에 울며 흐르는 저 시내야

무엇을 하려고 주야로 흐르느냐.

임 향한 내 뜻을 좇아 그칠 때를 모르는구나.

 

뫼는 길고길고 물은 멀고멀고

어버이 그린 뜻은 많고많고 크고크고

어디서 외기러기는 울고울고 가느니.

 

어버이 그리워할 줄을 처음부터 알건마는

임금 향한 뜻도 하늘이 내셨으니

진실로 임금을 잊으면 그게 불효인가 여기노라.

 

윤선도의 견회요 5수는 그리 절창은 아니다. 첫째 수에서 윤선도는 희비와 시비를 떠나 맡은 바 직분만을 다하겠다고 토로한다. 둘째 수에서는 자신이 하는 일이 임을 위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고, 셋째 수는 유배지 시냇가에서 임금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하고 있다. 이 세 수는 선비들이 흔히 쓰는 연군지정이다.

그런데 넷째 수에 이르면 윤선도 특유의 감칠맛 나는 조어(造語)가 빛을 발한다. ‘뫼는 길고길고 물은 멀고멀고’, ‘외기러기는 울고울고’ 등 우리말에 담긴 리듬감이 절묘하다.

다시 다섯째 수에서는 효와 충의 관계를 말하는 상투적인 어법으로 돌아간다. 요컨대 윤선도는 천재 시인은 아니었다.

이러함에도 견회요는 대학입시 수능에 자주 나오는 시험문제로서 고교생이 반드시 알아야 할 유배시조이다.

이어서 윤선도는 ‘비온 뒤의 노래’(우후요 雨後謠) 시조도 짓는다.

 

궂은비 개었단 말인가 흐리던 구름 걷혔단 말인가

앞내의 깊은 소(沼)가 다 맑아졌다는 것이냐

진실로 맑기만 맑아지면 갓끈 씻어 오리라.

 

그런데 윤선도는 이 시조의 창작동기를 적었다.

어떤 사람이 전하기를 당시의 재상이 허물을 고치자 때마침 궂은비가 갰다고 하였다. 나는 그의 허물 고침이 진실로 이 비가 개고 구름이 걷히고 앞내가 다시 맑아진 것과 같다면 우리들이 감히 그의 인(仁)으로 돌아가지 못하겠느냐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말로 노래를 지어 불렀다.

궂은비와 흐린 구름, 깊은 소(沼)는 자연이지만 정치현상이 담겨 있다. 이 시가 당시 재상의 동향을 듣고 지은 것이니 만큼 윤선도는 멀리 조선 끝 북단에 있어도 정치적 상황에 촉각을 곧추 세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시조 마지막 구의 “진실로 맑기만 맑아지면 갓끈 씻어 오리라.”는 정치가 바로 서면 정계에 나가서 포부를 펼치리라는 윤선도의 의지가 담겨있다.

원래 ‘갓끈을 씻으리라.’ 즉 탁영(濯纓)’은 기원전 3세기, 전국시대 초(楚)나라의 정치가이자 시인이었던 굴원(屈原 BC 343∼ BC 278)이 지은 책 『초사(楚辭)』의 ‘어부사(漁父辭)’에 나온다.

굴원은 초나라 회왕을 도와 정치를 했으나, 간신의 참소로 호남성의 상수로 추방당했다. 쫓겨난 그는 상수의 연못가를 거닐고 있었는데 한 어부를 만났다. 어부는 굴원에게 ‘무슨 까닭으로 여기까지 왔느냐’고 묻자, 굴원은 ‘온 세상이 모두가 흐려있는데 나 혼자만이 맑고 깨끗하였고, 뭇 사람들 모두가 취해 있는데 나 혼자만이 술에 깨어 있다가 그만 이렇게 추방당한 거라오.’라고 대답했다.

어부가 이 말을 듣고, ‘물결 흐르는 대로 살지, 어찌 고고하게 살다가 추방을 당하셨소?’라고 굴원에게 다시 묻자, 굴원이 대답하기를 ‘차라리 상수(湘水) 물가로 달려가 물고기 뱃속에서 장사(葬事)를 지낼지언정 어찌 이 어찌 희디흰 순백(純白)으로 세속의 티끌을 뒤집어 쓴단 말이오?’리 답했다.

어부는 빙그레 웃고는 노로 뱃전을 두드리며 떠나가면서 이렇게 노래를 불렀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 끈을 씻으리오.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오.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결국 굴원은 울분을 참지 못해 음력 5월 5일(단오일)에 멱라수(汨羅水)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1) 견회요의 원주에 “이하는 무오년(1618년, 광해군10) 경원 유배 때에 지은 것인데 여기에 붙인다.”라고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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