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의 멋을 찾아서(44) 광주무형문화제 18호 가야금병창 이영애
남도의 멋을 찾아서(44) 광주무형문화제 18호 가야금병창 이영애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8.03.20 17: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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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년 가야금으로 외길인생 걸어온 명인
“전통의 기본을 알아야 퓨전도 가능해”

“보물 중에 보물은 가야금병창이죠. 가야금 연주도 하고, 관객들과 눈을 맞추며 호흡하는 우리 전통음악을 키워야 합니다”

오직 한평생을 가야금병창으로 살아온 사람이 있다. 가야금을 튕기는 손가락과 현을 누르는 손가락은 누구보다도 단단하고, 굳건하다. 그의 손가락 굳은살에서 내공이 느껴진다.

광주시무형문화재 제18호 가야금병창 이영애(61) 명인의 실력은 ‘깊은 강물 같다’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잔잔하면서 깊은 내공이 느껴지는 그의 연주에는 그가 걸어온 50년의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이영애 명인을 만난 첫 인상은 배우 이영애처럼 단아하고 귀품이 느껴졌다. 단아한 얼굴에 창을 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꺼슬꺼슬 허스키한 음성으로 매력이 가득찼다.

아버지의 권유로 무릎에 올린 가야금

이 명인은 제자들을 가르치는 본인의 자택으로 초대했다. 그는 아파트 가장 꼭대기 층인 20층에서 가야금 제자들을 길러내고 있었다.

그의 자택은 아파트답지 않게 전통적인 분위기로 꾸며졌다. 20층의 하늘과 맞닿은 탁 트인 전망은 깊은 울림을 주는 가야금병창에 더욱 어울렸다. 가야금을 연주하면서 동시에 소리를 해야 하는 두 가지의 예능을 겸비한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혹여나 가야금 연주를 하면서 음을 잘못 튕길 수도 있으니 고개를 숙이며 손을 신경 써야 함과 동시에 입으로는 창을 하면서 관객들과 눈 맞춤을 해야 하는 어려운 예능이기 때문이다.

가야금병창으로 50여년의 세월을 걸어온 이영애 명인은 눈을 감고도 연주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다.

10살의 어린나이에 이 명인은 아버지의 권유로 가야금을 무릎에 올리게 됐다. 어느 정도 연주 실력이 가다듬어지자 아버지는 동네 사람들을 초대해 연주를 들려주는 자리를 마련했다.

“멋모르고 쑥스러움도 많았던 10살의 나이에 사람들 앞에서 가야금 연주를 하게 되면서 사람들 앞에 설 수 있는 ‘배짱’이 길러졌죠. 재미를 느끼면서 더욱 우리 전통 국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답니다.”

스스로 국악의 재미를 느낀 이 명인은 가야금을 무릎에서 내려놓지 않았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진학해서는 가야금에 푹 빠졌다. 부모님은 “제발 좀 그만 하고 쉬엄쉬엄 해라”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

그의 아버지는 늘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나라 악기를 배워야 우리나라가 살고, 문화가 산다”고 강조하셨고, 우리나라의 것을 찾는 시대가 올 거라는 가르침 속에 이 명인은 가야금 줄을 놓지 않았다.

가야금으로 출중한 실력, 젊은 시절부터 두각

사실 사춘기 시절 방황을 하기도 했다고 솔직히 털어 논다. “한길만 가는 사람은 그 한 가지를 하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생각해요. 가야금을 배우다 사춘기가 왔을 땐 마음을 다잡고 다시 가야금을 무릎위로 얹어놓기가 그렇게 힘들었어요”라고 한다.

그가 가야금을 잠시 놓게 되자 밤이 되면 가야금이 우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고, 줄이 터지는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이 명인은 마음을 다시 붙들고 가야금을 잡아야겠다고 다짐한다.

그렇게 동신여고를 다니던 시절에는 ‘가야금에 미쳐있는 얘다’라는 소문까지 날 정도로 가야금 현을 놓지 않았다.

보통 가야금산조는 가야금을 독주로 연주하는 것으로 고개를 숙이고 한다. 온전히 가야금 소리에만 집중하기 때문이다. 이 명인은 가야금 소리에만 집중하기 위해 불을 끄고 연주를 시도해봤다. 불을 끄고도 연주가 가능해지니 고개를 들고 관객과 눈을 맞추고 싶어졌다.

고개를 들고 가야금산조를 듣는 관객들의 환호와 표정을 보고 싶었다. 그리고 1977년 KBS ‘전국민속백일장’에 광주·전남 대표로 출전하게 되면서 그의 인생은 달라졌다. 이 대회에서 가야금산조로 ‘대상’을 수상하게 됐고, 영원한 스승 박귀희 선생을 만나게 됐다.

당시 심사위원이었던 박귀희 선생은 출중했던 이영애의 실력을 알아보고, 제자로 들였다. 그때부터 이 명인은 일주일에 1~2번씩 서울을 오가며, 박귀희 선생으로부터 소리도 하며 가야금을 연주하는 가야금병창을 제대로 배우게 됐다.

그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광주시립국악원 가야금 강사, 도립국악단 창단멤버, 시립국극단 등에서 활약을 펼치며 국악계에서 빛을 발휘했다.

그리고 당시 귀한 명인들을 배출하던 ‘전주대사습놀이’에 출전하면서 ‘장원’을 노리게 된다.

“처음에는 탈락을 맛보게 됐죠.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면서 죽기 살기로 연습만 하고 지냈어요. 그러다보니 다음해엔 장려상, 또 다음해에는 우수상, ‘차상’까지 올라 드디어 제25회 전주대사습놀이에서 ‘장원’을 받게 됐습니다.”

이 명인이 장원에 오르기까지는 꼬박 8년이 걸렸다. 일곱 번 넘어져도 여덟 번 일어선다는 7전 8기의 집념을 이 명인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이후 마침내 우륵전국가야금경연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게 되는 쾌거를 맛보게 됐다.

오장육부에서 나오는 시김새 있는 소리

지난 2007년에는 가야금병창, 한 장르로만을 대상으로 하는 대회를 만들기도 했다. 바로 ‘낙안읍성 전국가야금병창경연대회’다. 대회를 화순에서 처음 치르게 되면서 순천시에서 ‘같이 일을 해보자’라는 제안이 들어온 것이다. 이 대회는 낙안읍성에서 11년째를 맞이하게 됐고, 낙안읍성을 가면 매주 주말상설공연이 진행된다.

주말에 낙안읍성을 찾는 타지 방문객들과 외국인들의 시선을 한눈에 끌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 2014년 광주시 제18호 가야금병창 무형문화재에 선정되면서 최고의 영예를 얻게 됐다. 그는 문화재로서 제자양성에 게을리 하지 않고 우리 전통의 멋을 이어가기 위해 가야금을 내려놓지 않고 있다.

“가야금병창만 해서는 다양한 폭을 아우를 수 없습니다. 판소리와 가야금산조를 모두 버무려서 잘해야 오장육부에서 나오는 소리로 시김새 있게 관객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지금도 이 명인은 가야금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늘 공부와 연구를 해오고 있다고 한다. 나 자신이 노력하지 않으면 청중은 바뀌지 않는 소리를 금방 알아채기 때문이다.

이영애 명인은 전통과 결합한 퓨전에 대한 생각이 남다르다. 사실 요즘 전통만 하기엔 쉽지 않은 세상이다. “퓨전을 하더라도 기초가 전통으로 탄탄해야 한다고 봐요. 기초가 다져지지 않으면 빛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요즘 융·복합 시대라고 하지만, 그래도 전통을 지켜야 살아남을 수 있는 거죠”라고 말이다.

현재 이 명인은 자신의 스승인 박귀희 선생의 스승이었던 가야금병창 중시조 오태석 명인의 계보를 잇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다. 스승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이영애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지막 바람으로 “오태석 명인의 고향인 낙안읍성에 오태석 기념관이나 문화관이 지어졌으면 한다”며 끊임없이 국악발전에 대해 고뇌하고 있다.

이영애 명인의 가야금병창은 오는 4월 28일 전통문화관에서 판소리 수궁가 ‘별주부와 토끼의 봄’에서 만나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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