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비' 김진수 전 광미공 회장
'봄 비' 김진수 전 광미공 회장
  • 시민의소리
  • 승인 2002.03.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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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광미공 해단식과 기자회견을 마치고 우리는 3차 까지 갔다. 금남로엔 미처 우산을 챙기지 못한 사람들이 동구청 추녀 아래나 꽃가게에 같은 데에 몸을 기울여 오소소 비를 긋고, 여우비 쯤 일삼아 맞고 다니는 이도 보였다.

오전에만 해도 하늘은 말짱했고 정오 쯤엔 김준태 시인께서 해단식을 앞 둔 내게 위로차 전화를 걸어주었다. 요즘 몇 일 걸려오는 전화 중에는 인터뷰 요청도 있는데, 하는 수 없이 응하긴 하지만 미술인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일이 좀 쉬워야 말이지, 지레 겁부터 먹게 되는데 이번 전화목소리는 대뜸 달랐다. "진수선생, 왜 내 허락도 없이 광미공을 해체하는 거야, 아쉽잖아아, 지금 볼 수 있어?"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에 금새 몸 안이 환해졌다.

우리는 함께 왕자관에 앉아 광미공을 반찬 삼아 선배님이 좋아한다는 삼선짜장을 시켜 먹었다. 나는 입맛이 없는데 선배님은 일도 없이 곱빼기를 순간에 다 비웠고, 길 건너 샘터다방에 가서야 아침을 거를 만큼 바빴다는 걸 알았다.

나는 그 순간에도 간소한 해단식을 위해 외부 손님 한 분 초대하지 않은 해단식장의 분위기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동안 광미공을 사랑하고 가까이서 마음 써주신 지역의 어른들과 여러분들을 모셔서 우리의 아쉬우나 떳떳한 뜻을 알리고 또한 두루 사람 실망시킨 죄도 쥐어박히면서 해단식을 해도 해얄텐데 하며.

사실, 광미공 내에는 길고 많은 논의가 있었지만 설마 해체까지야 갈까 했던 사람이 많았고 그 가운데는 해체가 결정 난 후에도 하루도 얼굴 편 날 없이 아쉬워하는 이도 있었기 때문에 행사전반을 축소하고 없는 겸손이라도 지어 치르기로 해놓고 정작 내가 골똘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애써 찾아온 기자님들도 피익하고 시큰둥해 질 일 아닌가? 그렇잖아도 맥이 풀린 회원들에게 미안스런 일 아닌가?> 하여 나는 선배님께 해단식에 오셔서 한 마디 부쳐주십사 청하였고 어쩌면 말이 땅에 떨어질까 무섭게 '흐응'하고 응해 주었다. 즉흥시도 하나 덤해 주겠다 했다.

"광미공 그대는 그림을 들고 거리에 뛰쳐나온 전사들이었다........... 광미공 그대의 그림은 진정 내릴 수 없는 깃발이었다......."
제대로 옮겼는가 모르겠지만 우리들 깊어진 속앓이 달래기는 그 쯤이면 되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세월은 그리도 절로 가는가?

남들은 광미공 나이가 열네살이라니까 꼭 사춘기 꼭지 같다 어르지만, 하 세월 거리에서 묘지에서 만장 들고 걸게 들고 조각상 메고 그림 들고 축낸 정열만 몇 트럭분이던가?

망치 들고 아시바 치고 와이어 땡기고 냉방에서 새우잠 자기를 몇 양말이고 몇 장갑이었던가? 그림으로 싸우고 그림 그리다 싸워 얻은 상처가 그런데 흔적만 남고 깊어져버린 시절로 접어든 것 같다.

광미공 내에는 미술운동에 뛰어든 나이가 스무살에 넘나드는 이도 여럿이다. 80년 항쟁 나고 얼마 안 된 시점의 미술은 여전히 서구미술 배끼기식 아방가르드이거나 주로 뚱뚱한 미술아카데미즘이었다. 민민미술운동은 바로 이러한 경향의 미술문화와 시대에 당당히 맞서 본격 현실과 결합하는 미술, 한국현대사 그 격랑의 바다 위에 돛을 올리는 실험과 도전의 미술을 시작한 것이었다.

오월 선전미술은 곧 희망있는 미래의 정치요 사회요 밥이요 하늘이라는 믿음과 그리하여 화가들의 붓도 한 시대의 변혁과 진보의 가치를 생산하는 병기가 될 수 있음을 우리들은 그 시기로 부터 똑똑히 배워두었다.

앞에서 힘들었다는 말은 그러니까 좀 더 솔직하게 표현해서 그 시절이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 때가 오히려 아름다웠고 행복했던 순간들이었다 해야 할 것 같다. 문제는 새천년 들어 급류를 타는 전 지구적 변화 속에 민족민중미술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지 못하는 오늘이 힘든 것이었다. 우리는 최근 자신의 미진한 노력을 탓하기도 했고 더욱 달라져가는 시대의 눈길에 아파해 하기도 했다. 이제부터가 정말 중요하다며 훗날을 기약해 열심히들 살자고도 했다.

봄비가 정말로 봄비처럼 내리는 밤, 총무와 나는 우산 하나 빌려다가 먼저 뒷풀이자리를 일어서겠다는 선배님의 양 옆으로 매미처럼 붙었다. 꽤 멀리 까지 배웅하다 보니 서로 미안해 죽겠다. 평소 안하던 버릇이라서 오늘이 특별한 날임엔 틀림 없었다.

"발전적 해체니 호상했다." "인터넷 카페라도 차려 들락거리자" 하는 자위 섞인 말잔치를 끝으로 벗들과 헤어지는 밤길은 단연 봄비가 제격이었다.

나는 무단횡단을 함부로 하고 광주우체국 사거리를 지나 날랜 젊은이들과 똑같이 어깨를 흔들며 내가 광미공 일 하다 종종 들리던 추억의 카페도 스치고 별안간 호주머니에서 선언문을 꺼내어 뒷장에 뭘 궁시렁거리며 적기도 하고 목젖 눕혀 맨 하늘을 바라다보기도 하면서 낯익은 불로동 다리를 건너 새벽 광주천변을 하얗게 걸어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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