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작권자 © 시민의소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들불열사님들이여, 우물 안에서 개구리가 하늘을 봅니다·6
- 들불 부부
<1>
-축-
결혼
청첩장은 안 돌려
모르는 사람 모르고
아는 사람은 알아서
몇몇 몇몇이
부줏돈 어히할까
흰 봉투는 어히할까,
한겨울 매운 칼바람 속에
모였네라
저만큼 저만큼
예식장 앞에 두고
젖은 눈시울 닦아내고
옷깃 여미우고
아무렇지 않은 듯
심장 깊이
산도 무너질 듯한 한숨
크으게 내쉬고
다들 모이었네라
상여
꽃상여 뒤를 따르듯
마음 속에 깃발 나부끼며
만장 자락 나부끼며
축하하러 온
사람 사람들
살아 있는 사람들
살아 남은 사람들
<2>
신랑
흥- 일배-
건너
2월의 마른 풀
우우우 일어나
가녀린 잎잎 흔들고
건너
2월의 마른 나무
으흐흐 어깨를 세워
낮게 박수를 치고
신부
흥- 일배-
고와라
연지 곤지
수줍어라
붉은 두 볼
무명이라 또렷이 적힌
유택의 주인도
뼈 마디 부딪혀
축하를 하고
저 건너
아니 보이는 신랑이
고개와 허리 숙여
무릎 꿇고 절을 하네
이 건너
아니 보이는 신부
이마에 양손 맞대고
다소곳 절을 하네
저 건너 이 건너
작은 비석으로
말없이 마주 서서
맞절을 하네
당신은 천사였소,
천국의 신부도
한 옛날 시집가던 날 떠올리며
꽃다발 선사하고
용준 정연도
바람결에 목청 높혀,
형님 형수님
축하해요
행복하게 사세요.
언제 웃을 일 있었으리
곁에 누운 망자들도
황토흙 털고 일어나
오랫만에 웃음꽃
신부 어머니는
영정 속의 딸 사위에게
가슴 깊이 묻어둔 기순의
옛 공장월급 3만원 손에 쥐어주며
잘 살소
어짰든 잘 살어
이것으로 어디라도
휭허니 댕겨들 오소
지화자 좋아라
이 좋은 날
지화자 설워 설워라
영혼의 눈물의
신부 신랑이여
<3>
때는 82년 2월 20일
여전한 칼바람
마음 속의 만장 자락은
더욱 거세게 나부끼고
행진.
두 몸이
한 몸 되고
두 마음이
한 마음 되는
첫 발자욱.
아니 보이는 신부 신랑이
팔짱을 끼었네
넋으로 영혼으로 내딛는
첫 발자욱
어느새 칼바람 잠들고
마른 풀
마른 나뭇가지
숨을 죽이고
행진!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 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명세 -
무명의
유택 주인 입을 열어,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
천국에서 만납시다,
천국의 신부 입을 열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
두 주목을 불끈 쥔
용준과 금희오빠 입을 열어,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
깨어나서 외치는
뜨거운 함성 -
흐드러지던 웃음꽃 접고
망자들 입을 열어,
앞서서 가나니
산 자여 따르라 -
신부 박기순 신랑 윤상원
입을 열어 한 입으로,
앞서서 가나니
산 자여 따르라 -
행진은 계속되고
님을 위한 행진곡은
들불처럼 멀리멀리 번져가고
<4>
바람이 차요.
별빛은 따듯한데-.
그래요, 달빛도 따뜻해요.
기억하는지?
나는 생각나요
안 잊어 먹고 있어요
님의 눈길
성탄의 노래 아득히
내가 누워 서늘히 누워
숨도 아니 쉬고
거기 영안실에 누워 있을 때
님이 내 곁으로 오셨지요
말을 잊고
망망히 나를 바라보던
님의 눈길 안 잊혀요
속울음으로 님은 말했지요,
불꽃처럼 살다 간 누이여
왜 말없이
눈을 감고만 있는가 하고.
그래, 나도 기억하지.
그날을 잊을 리야
흰 솜으로 그대의 코를 막고
흰 솜으로 그대의 열린 입술을
막았을 때
나는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오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그러면 참말로
기순이는 죽어 버린다고
고마워요, 고마워요.
숨이야 멎었지만 님의 애타는 속엣말을
차웁게 식은 귀로 듣고 있었어요
넋으로 다 들었어요
기순 누이
이제는 나의 아내여
두 볼이 흐르던 장미빛
그대는 늘 서럽도록 아름다웠지.
개원 오빠
이제는 나의 남편이여
공장에서도 들불에서도
내가 넋으로 지켜본 저 도청 안에서도
그대는 믿음직한
오빠였어요.
정다운 이야기는 끝이 없고
달이 차서 기울어도
둘만의 첫날밤은
기울지 않았네라
설레이는 신방도 없이
묘지의 첫날밤은
그렇게 그렇게
<5>
꽃이 피고
한 계절
꽃이 지고
한 계절
삼백예순 날
새움 돋고
칠석날
눈비 오고
섣달그믐
또 삼백예순 날
달 뜨는 그 언덕에
망월에 계시는
님들은 님들은
들불의 부부
남들 다 있는
찬란한 천연색의
빛 바랜 흑백의
결혼사진 한 장 없어도
살은 흙이 가져가고
뼈는
흐르는 세월이 데려가도
영혼으로 함께 살아
5월의 자식들을
열도 스물도, 백 명도 천 명도
더 낳고 키우고 기를
우리들의 영원한
신부 신랑이여
님들께 바친 노래는
님들 앞에서 목놓아 부르던
님을 위한 행진곡은
이제 이제
우리를 위한
행진곡이 되어지고
●들불야학의 핵심멤버로 활동했던 박기순, 윤상원 두 열사는 82년 2월 망월묘지에서 영혼결혼식을 올렸다.
최신 HOT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