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불열사연작시 5- 박용준
들불열사연작시 5- 박용준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1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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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불열사님들이여! 우물 안에서 개구리가 하늘을 봅니다·5 - 박 용 준 <1> 천애고아, 당신은 어쩌자고 가정 하나도 꾸리지 않으셨습니까 어쩌자고 일찍 장가들어 부모 노릇 한 번 못해 보시었습니까 천애 天·涯 나는 배웠네라 천애란,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핏줄도 부모도 없음을 이르는 말이라고, 보리밥이든 쌀밥이든 부모 있어 뜨신 밥 한 그릇 맛나게 먹어 본 사람들은 아랫목이든 윗목이든 부모 있어 피붙이 있어 온기 있는 방에서 깊이 잠들어 본 사람들은 알 수 없으리 당신의 천애를 죽는 날까지 알 수는 없으리 고아 孤·兒 우리는 알고 있네라 고아란, 이 세상에 부모를 여의어 몸 붙일 곳 없는 고즈녘한 사람이라고, 어려서 당신의 집은 영신영아원 조금 커서 당신의 집은 무등육아원 조금 조금 더 커서 당신의 집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배워야겠기에 그래도 공부는 해야겠기에 학력이 아니라 뭔가는 알아야겠기에 고학 苦·學 나는 알고 있네라 고학이란, 자기 힘으로 학비 벌어 책값 공책값 벌어 고생하며 배우는 것이라고, 아, 부모형제 있는 나는 모르고 있네라 학비 벌어 책값 벌어 공책값 벌어 공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님이여, 그렇게 자란 당신이 어쩌자고 지금도 혼자이십니까 어쩌자고 그토록 높이 간직한 배움을 다 써먹지도 못하고 가시었습니까 <2> 빛 빛은 도심의 불빛만이 빛이 아니거늘 빛 동터오는 동녘의 햇빛만이 빛이 아니거늘 지하의 고문의 외마디의 비명을 지켜보는 백열등 전등불 그것만이 빛이 아니거늘 빛, 그러하였네라 당신은 빛과 함께 살았네라 별빛보다 초롱초롱한 간밤 노동자의 빛 한밤 들불의 눈빛과 함께 살았네라 <3> 빛, 빛, 당신이 손으로 온몸으로 정성으로 닦아내면 이내 동무처럼 벗처럼 찾아오던 빛. 누군가의 구두 위에서 치솟던 빛 당신은 당신은 구두닦이였네라 당신은 날마다 남의 신발 속에서도 거울처럼이나 자신을 되비추어 보았으리 너는 누구냐고 나는 누구냐고 우리, 한 번이라도 내 빛나는 구두 위에 얼굴을 비추이고 나를 바라본 적 있었던가 우리, 한 번이라도 고개를 들어 저 하늘 한 가운데의 아폴론과 마주한 적 있었던가 오, 빛이여 세상이 어지러우면 먼저 떠나가던 빛이여 어두울수록 더욱 그리웁던 사람 사는 세상의 빛이여 그러나 그러나 당신은 계절의 여왕이라던 오월의 저 27일 동터오는 동녘의 햇빛 다 깃들기도 전에 당신은 떠났네라 영원히 <4> 빛은 멀지 않은 곳 당신이 또렷또렷 찍어낸 글자 위에서 빛나고 빛은 부모처럼 반갑게 시민들이 얼싸안은 투사회보 속에서 빛나고 빛은 끝까지 움켜쥔 한 자루의 총 그 방아쇠 위에서 빛나고 그리고 교전 탕, 너희는 적 적의 총구에서 불빛이 발광을 하고 탕, 당신의 올곧은 총구에서 불빛이 응사를 하고 탕, 탕, 탕탕, 탕탕, 탕탕탕, 타타타타타탕탕타탕 이윽고 순간의 침묵 침묵을 깨고 다시 타앙! 서늘히 꺼져가던 빛이여 너무도 더디게 식어가던 빛이여 그날 이후 당신은 이 지상에 없습니다. 그날로 한 자루의 총은 주인을 잃었습니다. 곱게도 생긴 당신 그 얼굴의 눈빛이여 뜬눈으로, 몹시도 느리게 사라져 가던 그 눈매의 눈빛이여 끝내 감을 수 없었던 그 눈으로 당신이, 당신께서 가장 나중에 본 것은 무엇입니까 님이여, 천·애·고·아 당신이여 당신이 뜨거운 눈빛으로 하늘을 보며 살아서 가장 나중에 무슨 말을 하시었습니까? 그것도 모르고 그것도 모르고 그 하늘에 차디찬 증표 하나 덩그러이 세우면 되는 양 우리는 지금 우물 속 개구리가 되어 하늘을 봅니다. ●박용준(1956∼1980) 천애고아로서 어린시절은 영신영아원에서 자라고 청소년시절을 무등육아원에서 보냈다. 고아원 퇴소 후 온갖 힘든 일을 다하며 공부를 계속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방송통신대에 입학하는 등 집요한 향학열을 보였다. 1978년 YWCA신용협동조합 수금사원으로 일하던 중 김영철 열사를 만나 의형제를 맺게 되었다. 이후 김영철 열사와 함께 기거하면서 주민운동에 동참하였고, 들불야학의 특별강학이 되었다. 5 18민중항쟁 당시 들불야학팀과 함께 투사회보를 제작할 때 필경을 도맡아 하였고, 종이보급을 책임지기도 하였다. 또한 시민군이 되어 5월 27일 새벽까지 광주를 지키다가 YWCA에서 신군부쿠테타군과 교전 중 최후를 맞았다. <윤상원민주사회연구소 자료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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