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불열사 연작시 3-박관현
들불열사 연작시 3-박관현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1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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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불열사님들이여! 우물 안에서 개구리가 하늘을 봅니다·3 - 박 관 현 <1> 촌놈, 당신은 어쩌자고 높은 검판사는 꿈꾸지 않으셨습니까 어쩌자고 법대생이 법을 어겨 감옥에 갇히셨습니까 1952년 전쟁의 포성이 가라앉지 않은 나라. 논밭 거름이기에 오줌 똥마저 집에서- 바깥에서는 싸지 말라던 농촌 1952년 6월 헐벗은 남도 찢어지는 영광군 불갑 쌍운리 한 농투산이는 아들 하나 얻어 근심은 어떻게든 굶기지 않고 키우는 것 어떻게든 가르쳐서 반듯한 순사, 면서기쯤 되어 준다면 욕심으로는 판검사가 되어 준다면 그런 부모의 바램 몰랐을 리야 모르는 척 법전 앞에 머리 싸매고 민법인들 형법인들 이잡듯 뒤지고 파헤치고 공부할 줄 몰랐을 리야 72년이런가, 내가 중학생 교복 입고 놀러 갔던 화교학교 근처 계림동 오거리 구불구불 저 안쪽 당신의 옛 자취방 그 방에서 굶듯 살며 심상치 않게 써놓았던 당신 필체의 글씨 몇자 그 낙서장에서 나는 읽었네라 점심도시락 양철 반찬통에 3년 내내 고추장만 싸오던 당신의 동생 나의 동창에게서도 나는 당신의 꿈 들었네라 님이여, 어쩌자고 그러한 당신은 배불리 사는 길을 가지 않으셨습니까 어쩌자고 어려서 주린 배 다시 움켜쥐고 배고픈 채로 영영 가시었습니까 <2> 새벽 2시 15분 그 시각은 몇년 전 들불의 토론이 끝나던 시각 야근의 공장 불빛 성성하던 시각 1982년 10월 12일 새벽 2시 15분 허기는 잊은 지 오래 초롱하던 정신마저 서른 살 청춘마저 그대 육신을 정녕 떠나가고 그 시각 이후 당신은 이 지상에 없습니다 그날로 감방의 푸른옷은 주인을 잃었습니다. 하얀 고무신에 어린 새하얀 세상 이루고자 한 그 서러운 꿈만 우리 곁에 남겨두고 당신은 그렇게 가시었습니다 그리워 용봉 뜨락의 당신 그믐밤에도 보름달처럼 웃던 들불의 당신 도청앞 분수대에 백두만큼 장백산만큼 높이 올라 불을 토하던 고구려 사나이 하나 그리워 나는 듣네라 당신 목소리- 쌍운리 옛집 한 번 가고 잪소 정든 용봉 뜨락 한 번 거닐고 잪소 저벅저벅 거기 광천동에 한 번 가보고 잪소 도청앞 분수대에 다시 한 번 오르고 뛰어 오르고 잡소- 배고픔도 배부름도 없는 곳에 계시는 님이여 그곳에서 아, 그토록 하늘을 찌르던 사자후는 어찌 참고 계십니까? 어찌 삭히고 계십니까? 그것도 모르고 그것도 모르고 돌, 청동, 시멘트로 하늘을 찌르면 되는 양 우리는 우물 속 개구리가 되어 하늘을 봅니다 ●박관현(1953-1982) 군복무를 마치고 전남대 법과대학에 진학하였으며 '공단노동자 실태조사반'의 일원으로 헌신적인 활동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들불야학 사람들의 관심 대상이 되었다. 공단노동자 실태조사가 끝난 후 '사회조사연구회'의 창립에 참여하였다. 들불야학에 대한 당국의 탄압이 극심해져 야학이 어려움에 처하게 되자 야학참여에 동의함으로써 들불강학이 되었다. 80년 봄에 학생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전남대 총학생회장에 당선된 후 학원민주화와 사회민주화운동에서 보여준 민주화에 대한 그의 열정과 사자후는 듣는 이들을 감동시켰다. 특히 80년 5월 14일부터 16일까지 도청 앞 광장에서 매일 열렸던 민족민주화 대성회를 주도하여 광주시민들의 사회민주화에 대한 기대와 동참을 끌어내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5 17군사쿠테타 발발 후 현상수배 당해 서울 도봉구의 어느 편물공장 노동자로 위장취업 중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광주교도소에서 복역 중 신영일 열사와 함께 5 18진상규명과 교도소 내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3차례에 걸친 40여일 간의 단식투쟁 끝에 탈진하여 영면하였다. <윤상원민주사회연구소 자료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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