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불열사 연작시 2-박기순
들불열사 연작시 2-박기순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1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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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불열사님들이여! 우물 안에서 개구리가 하늘을 봅니다·2 - 박 기 순 <1> 부모님, 어쩌자고 자식에게 가난을 유산인 양 물려 주셨습니까 어쩌자고 딸에게 뜨신 방 한 칸도 마련해 주지 못 하시었습니까 누구에게나 꿈 많은 여고시절 같은 날 똑같이 교문을 나선 뒤 너는 멀리 공장, 일터로 나는 다시 대학 교문으로 그러나 나만 배워 편히 사는 건 모르는 척 빛나는 상아탑 아래서 갈봄 여름겨울 낭만으로 청춘 사르는 건 불편하고 허용 못할 일이어서 다투어 다다른 곳 광천동 노동이 살아 숨쉬던 곳 반절은 선생으로 반절은 학생으로 가르치는 것 절반 배우는 것 절반 별빛과 함께 달빛과 더불어 야학은 늘 그러하였네라 높낮이 없이 어깨동무를 하고 나란히 나란히 깨우치며 눈꺼풀 무겁고 몸은 휘청거려도 마음은 여명 향해 한마음이었네라 그 수고로움도 모자라, 이제는 위장취업을 넘어 익명의 노동자로 낮과 밤이 따로 없었나니 님이여, 어쩌자고 당신은 그리도 고단한 일을 택하셨습니까 어쩌자고 편안한 길 내버려두고 곤하고 피곤한 길로만 가시었습니까 <2> 팍팍한 발걸음 이끌고 새벽녘에야 찾아든 어두운 오빠네 둥지 마음의 들불은 덥고 뜨거웠으나 육신의 방은 춥고 써늘하였네라 오빠라 하여 넉넉하였으리 사는 일이야 다들 팍팍하였거늘 남선연탄은 10전이나 더 비싸서 대흥연탄은 10전이나 더 값싸서 신문지 뭉쳐 불쏘시개 삼고 잔 나무 깔고 젖은 대흥탄 얹고 번개처럼 그렇게 타오르길 기다렸으나 불꽃보다 먼저 밀려든 잠 오빠네에서의 달디단 새벽잠 한숨 그날 이후 당신은 이 지상에 없습니다 그날로 대흥탄은 주인을 잃었습니다 달 뜨는 언덕에 계시는 님이여 그곳은 아, 거기 지하의 방 한 칸은 따뜻합니까? 편안합니까? 그것도 모르고 그것도 모르고 연탄만한 동그라미 그게 하늘인 양 우리는 지금 우물 속 개구리가 되어 하늘을 봅니다 ●박기순(1957∼1978) 1978년 6월 전남대 민주교육지표사건으로 무기정학을 당한 뒤, 그 해 7월 이 지역출신으로 서울에 유학 중이던 대학생 최기혁, 전복길, 김영철 그리고 전남대생 나상진, 임낙평, 신영일, 이경옥 등과 함께 노동운동의 새싹을 뿌리기 위해 들불야학을 창립하였다. 그리고 그 해 10월에는 광천공단 내 동신강건사에 입사하여 광주전남지역 최초의 위장취업노동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처럼 위장취업하고 있던 윤상원 열사를 만나 들불야학강학으로 끌어들이는 등 들불야학을 강화하기 위해 헌신했다. 대학생으로서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낮에는 공장에서 밤에는 야학에서 노동자들과 함께 하면서 노동자들이 역사의 주인되는 새로운 사회를 꿈꾸며 억척스럽게 뛰어다녔던 선구적 노동운동가였던 그녀는 정작 자신의 방에 스며든 연탄가스는 이겨내지 못하고 말았다. 이 땅의 노동자를 위해, 노동세상을 위해 쓰러져 간 박기순 열사는 영원한 동지 윤상원과 1982년 2월 산자들이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망월묘역에서 영혼결혼식을 올렸다. <윤상원민주사회연구소 자료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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