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광주교도소-왠지 낯설지 않은 이유는?
16.광주교도소-왠지 낯설지 않은 이유는?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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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사람들에게 평생동안 절대 가지 말아야 할 곳을 꼽으라면 단연 감옥일 것이다. 그러나 어찌어찌하여 자의든 타의든 감옥을 가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특히 민주도시 광주에서는 전국의 어느 지역보다 많은 이들이 감옥을 경험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감옥도 엄연하게 광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이 때문에 80년이후 광주교도소는 '흉악한 범죄자들만의 거처가 아닌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또다른 삶의 현장'이라는 왠지 낯설지 않고 심지어 묘한 친근감(?)을 느끼는 광주사람들도 적지 않으리라.

광주교도소의 역사는 190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7월16일 지금의 전남여고 옆을 지나던 동계천 건너편에 '광주감옥'이란 이름으로 개청한 것이다.

물론 광주의 감옥은 이보다 훨씬 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짐작되지만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은 극히 미약하다. 동구문화원 이현채 원장도 "감옥에 대한 기록은 광주감옥이전은 물론 그 이후에도 거의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1908년 전남여고 건너편 '광주감옥' 들어서
71년 현 위치 옮겨와 5월항쟁 무대되기도
양민희생 시민들 고초 역사 안은 '사적지'
주변지역 아파트촌 변모 도심외곽이전 추진중


다만 조선시대에 광주가 목사고을임을 감안하면 목사에게 행정 입법 사법 3권이 주어진 마당에 죄인을 가둘 감옥은 어디엔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08년 근대적인 감옥을 개청하면서 당시 광주읍성 동문 바로 밖에 만든 것도 인근에 감옥이 있었지 않았겠느냐는 추측을 낳게 할 따름이다.

광주교도소에도 1908년 개청한 이래 1923년 5월5일 광주형무소로 개칭했고 1961년 12월23일 광주교도소로 이름을 다시 바꾼데 이어 1971년 7월15일 현재의 위치로 이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간단한 연혁만 전해내려 온다.

사실 누가 하필 교도소의 역사를 착실히 기록해 놓았을까 싶다.

광주교도소가 일반인들에게 회자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80년 광주항쟁과 관련해서일 것이다. 실제로 광주교도소는 광주항쟁 사적지중 하나이기도 하다.

그곳은 5·18민중항쟁 당시 계엄군이 주둔해 있었으며 바로 앞 도로에서는 담양, 순천방면으로 이동하던 차량과 시민들에게 총격을 가해 많은 양민이 희생당했다. 계엄군의 이런 행위를 항의하기 위해 달려간 시민에게도 중화기로 무차별 사격을 가함으로써 많은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또한 항쟁기간 중 수많은 시민들이 계엄군에 의해 광주교도소로 끌려와 무자비한 고문을 받았고, 그 과정에서 사망한 희생자 시신은 인근 야산에 매장되었다가 5·18직후 발굴되기도 했다.

특히 광주교도소는 5·18의 도덕성과 순수성을 반증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바로 전두환 정권은 교도소 인근에서 희생된 시민들에 대해 교도소를 습격하려다 자위권 차원에서 발포한 계엄군에 의해 숨진 것이라고 주장하며 광주항쟁을 폭동으로 몰아붙이는 소재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0년 5월21일 광주시의 전지역에서 계엄군을 몰아내고 승리를 쟁취했지만 유독 교도소만은 장악하지 않았다. 광주항쟁이 국가를 전복하기 위한 폭동이 아니라는 것은 여기에서도 어느정도 확인되는 대목인 것이다.

광주교도소는 광주도시발전과 함께 다시 이전해야할 운명에 처해있다. 90년대 초반부터 광주시와 광주상공회의소가 앞장서 도시발전의 걸림돌로 지목하며 교도소이전을 추진하고 있는 것.

80년대후반 까지만해도 시외곽지역에 속했던 광주교도소가 90년대들어 고층 아파트 등이 들어서면서 주택단지로 변했고 교도소와 5백m도 채 안되는 거리에 초등학교가 자리잡고 있어 정서적으로 문제가 많다는 이유 때문이다. 특히 인근에 광주관문인 동광주 인터체인지가 위치하고 있어 광주의 이미지에도 좋지 않다는 점도 이전의 필요성으로 제기됐다.

이에따라 광주시와 상의 등이 법무부와 건설부 등에 교도소 이전 등을 건의하기 시작했고 고재유 시장 취임이후에는 이전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법무부가 지난 99년 7월 광주교도소 이전을 위한 부지선정 기준으로 ▲이전부지가 6만평 이상(건물 연면적 2만2천평 이상)이여야 하고 ▲광주고·지검으로부터 15㎞이내 ▲국도 및 지방도로로부터 은폐가 가능하면서 교통이 편리하고 상하수도, 전기, 통신, 도시가스 등 기존 도시기반시설과 연결이 용이한 곳 등을 확정하고 이를 광주시에 통보하기에 이른 것.

이에따라 광주시는 광산구 고령동, 남구 노대동, 북구 삼각동 등 3곳을 이전부지로 선정하고 현 교도소 부지 3만3천평과 주변 미개발지 4만2천평 등 7만5천평을 인근 화물터미널과 농산물공판장, 북부터미널 예정부지와 함께 종합유통단지로 개발할 계획까지 세웠다. 그러나 아직까지 예산확보 등이 제대로 안돼 교도소 이전은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이에대해 광주시와 광주교도소 관계자들은 "예산상의 이유 등으로 당분간은 광주교도소 이전이 쉽지 않겠지만 이전의 필요성과 타당성은 모두 공감하고 있다"고 말했다.

어쨌든 교도소는 이전해 갈 것이라는 것이다.

시민들도 그렇게 믿고 있을 것이다. 누구도 교도소를 '가까이' 두고 싶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어진 기사 -동명동 농장다리의 사연

재소자들이 농장가던 다리
현 법원자리 재소자 노역하던 채소농장


젊은세대에게 71년까지만해도 동명동에 광주교도소가 있었다는 사실이 생소할 수밖에 없다. 동명동 농장다리도 마찬가지다.

사실 농장다리는 광주교도소와 관련돼 작명된 이름이라고 전해진다. 바로 교도소 재소자들이 농장으로 가는 다리였다는 것.

실제로 지금의 법원 검찰청 자리 부근이 과거 광주교도소 재소자들의 노역장인 채소농장이 있었고 교도소에서 이 농장으로 가려면 다리를 건너야 했는데 그 다리가 바로 지금의 농장다리였다는 것이다. 채소농장 인근에는 민간인들이 재배하던 딸기밭도 꽤나 유명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어쨌든 지금의 광주도심에 교도소가 있었고 바로 옆에는 채소농장과 딸기밭이 있었다는데 이제는 도심공동화를 걱정할 정도니 광주는 정말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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