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의병정신의 뿌리를 찾아서7. 군대 강제해산, 서울 진격작전 이어지다
호남 의병정신의 뿌리를 찾아서7. 군대 강제해산, 서울 진격작전 이어지다
  • 서울=김다이, 송선옥 기자
  • 승인 2015.10.22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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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탈환작전 실패 이후 일본군의 남한대토벌작전

전국 방방곡곡에서 활동했던 의병들이 한 곳에 모이게 된 것은 후기 의병시기인 정미의병(丁未義兵) 때다. 정미의병의 발원터는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 위치했다.

정미의병의 가장 큰 특징은 서울 진격작전을 펼치기 위해 전국의 의병들이 모여 의병봉기를 했다는 점이다. 이는 1907년 대한제국 군대의 강제해산으로 이에 반발한 해산군인들이 대거 참여한 데서 비롯한다. 이 때부터 의병운동은 더 이상 ‘운동’이 아닌 ‘전쟁’이 되었다.

대대장 박승환 자결, 의병봉기 단초 역할

대한제국 군대 강제 해산이 내려진 1907년 8월 1일. 서울의 시위대(侍衛隊) 대대장 박승환(朴昇煥 1869 ~ 1907)이 자결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면서 해산군인들의 대일항전이 시작했다. 대대장의 자결이 의병봉기의 단초가 되었다.

교과서에서 자주 보던 총, 칼을 든 의병들의 단체사진이 바로 무력으로 싸웠던 시기인 정미의병 때라고 한다. 각 지역에서 봉기한 해산군인들은 각자 의병에 가담하여 항일의병전의 주축이 되었다.

정미의병의 발원터를 찾아 서울특별시 중구 서소문동에 위치한 부영빌딩 앞을 찾았다. 이 지역 일대는 사람들이 빽빽한 서울 도심의 대표적인 오피스 타운이다.

대한상공회의소와 금융기관, 대기업이 밀집되어 있어 점심을 먹으러 나온 직장인들이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부영빌딩 앞 화단에는 정미의병이 발원하게 된 곳임을 알려주는 작은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

하지만 비석은 화단 구석에 놓여 있어 눈에 잘 띄지 않아 별도로 안내판의 필요성이 있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점심시간 이후 마실 중인 직장인들도 이 주변을 서성이며 지나칠 뿐 관심 있게 쳐다보는 사람은 없었다.

‘정미의병 발원터’는 시위보병 제 1대대장 박승환이 울분을 토하며 ‘대한제국만세’를 외치고 자결한 곳이다. 이를 계기로 해산한 군인들이 탄약과 무기고를 털고 무장봉기를 했고, 정미의병의 기초를 놓았다.

13도 창의군, 서울 진격작전 추진해

1907년 정미의병의 대표적 의병장은 이인영(李麟榮 1868~1909)이다. 당시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13도 창의군(十三道倡義軍)을 결성하고, 전국의병진을 연합해 1908년 서울 진격작전을 추진하게 됐다.

13도 창의군은 서울 진격에 앞서 각국의 영사관에 편지를 보내 자신들을 국제법상 교전단체로 인정해 줄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총대장 이인영은 해외동포들에게 격문을 보내기도 했다.

당시 13도 창의군을 이끌었던 총수인 이인영은 갑작스런 부친의 부음을 받고, 3년상 때문에 지휘권을 허위(許蔿 1855∼1908)에게 맡긴 후 귀향해버렸다.

이후 허위를 포함한 선발대가 동대문 일대까지 진격했으나 신식무기를 가졌던 일본군의 반격에 대항하기 힘들었고, 결국 서울 진격작전을 실패로 돌아갔다.

총대장이 없는 연합군은 다시 전국으로 흩어지게 됐다. 한편 항일투쟁의식이 드높았던 호남지역에서는 항일의병활동을 계속 이어나갔고, 일본은 마지막 소탕작전을 한다는 의미로 1909년 남한대토벌작전을 펼치게 된다.

서울에 의병과 연관된 유적지를 찾아 종로로 발길을 돌렸다. 전옥서(典獄署) 터는 매년 12월 31일 자정에 ‘제야의 종’ 타종행사가 열리는 종각역 인근에 위치해 있다. 조선시대 죄인을 수감한 감옥으로 한말 항일 의병들이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곳이다.

종로구 서린동에 위치한 전옥서 터는 종각역 6번 출구에서 나오면 오른쪽 화단에 바로 보인다. 전옥서는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미결수를 수감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전옥서 터도 정미의병 발원터와 마찬가지로 이 자리에 있었다고 표시하는 비석만 세워져 있다. 또한 화단 내에 있어 관심 있게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을 자리에 있었다. 전옥서에 얼마나 많은 의병들이 끌려왔을까 잠시 회상에 잠겨본다.

의병 출신 후손 생활환경 열악해

2곳의 현장 취재를 끝낸 후 들린 곳은 세종대로에 위치한 대한민국 역사박물관이었다. 세종대왕 동상과 이순신 장군의 동상이 서있는 광화문 광장 일대는 국정 역사교과서 반대시위와 찬성하는 세력으로 떠들썩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끝나지 않은 세월호 추모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대한민국 역사박물관 한켠에는 항일의병활동 시기를 조명해놓은 전시 공간이 있었다. 이곳에서 전남 구례 일대에서 활약한 의병장 고광순이 사용한 불원복 태극기가 전시되어 있어 반가웠다.

비록 복제본이긴 했지만 호남지역에서 활약한 의병장의 이름 석 자만 봐도 어딜 가도 반가운 마음이 먼저 앞선다. 이외에도 13도 창의군과 전국에 퍼진 의병장의 지역을 알아볼 수 있는 지도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취재진은 항일의병 투쟁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의병장들을 찾아 서대문형무소 역사관도 찾았다. 민족저항실Ⅰ에서부터 항일의병에 관련된 자료들을 볼 수 있었다.

13도 창의군의 총대장을 맡았던 이인영 의병장의 판결문, 서울 진격을 목표로 발의한 건에 대한 보고서인 서울진격보고서, 이강년 의병장의 옥중서한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대표적인 의병장 이강년(李康䄵), 허 위(許蔿), 이인영(李麟榮), 이은찬(李殷瓚) 의병장에 대한 약력을 살펴 볼 수 있었다.

지난 2013년에 출범한 (사)의병기념사업총연합회 김한수 회장을 만나 더 세세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김한수 회장은 “의병들의 후손은 잘 살고 있는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 잘 살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며 “광복군의 경우는 살아남아서 임시정부에서 정권을 잡아보기도 했지만 의병들의 후손들은 그렇지 못한 편이다”고 재조명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김 회장은 “지금은 한 계단씩 딛고 있는 단계로 연해주, 길림성 등 중국부터 의병활동의 흔적과 뿌리를 찾고자 한다”며 “현재 연합회가 앞으로 해야 할 일의 첫 계단을 딛고 있고, 나중에는 수많은 의병관련 단체를 통합해 함께 활동할 계획을 마련중이다”고 말했다.

이처럼 광복 70주년을 맞이해 항일의병운동의 의병장들에 대한 이야기가 재조명되고 있는 가운데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무명의 호남의병에 대한 구체적인 조사와 발굴도 필요한 실정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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