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사', 봐야 할 모든 것을 예고편에서 다 보았다
'무사', 봐야 할 모든 것을 예고편에서 다 보았다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09.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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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과 베트남에 한국의 스타들이 바람을 일으키고, 헐리우드 위력을 누르며 한국영화가 일어서고 있다. 그러나 저 밑바닥에 스며드는 불안감을 지울 수 없다. 고급문화는 철저히 위선적이고, 대중문화는 지나치게 천박하다. 철저한 위선과 지나친 천박을 반성하는 낌새는 좀처럼 찾기 힘들다. 그래서 고급문화와 대중문화가 제대로 만나지 못하니, 이런 좋은 시절을 만나도 모래성을 보듯이 불안감을 떨치지 못한다. 예고편에 나오는 장면 말고는 볼 게 없는 영화가 있다. [무사]가 그랬다. 제법 멋있고 괜찮은 장면은 예고편에서 거의 다 나온다. 굳이 보태자면 낭자한 피가 난무하는 싸움 장면이 상당히 실감난다. 모가지나 발목이 댕강 잘리고 머리통을 그대로 찍어 박살내거나, 휘두르는 칼 내지르는 창 날아드는 화살이 붉은 피를 품으며 머리 목 몸통을 무지막지하게 꿰뚫어 버린다. 그야말로 여지없이 잔혹하다. 이 영화는 [외팔이] [소오강호] [동방불패] [와호장룡]과 같은 무림고수들의 무술솜씨를 보여주는 무협영화가 아니다. 역마차가 달리는 서부영화나 금괴를 다투는 서부 은행강도들의 싸움을 닮았다. 내리꽂히는 화살이나 내달리는 몽고 기마병들. 인디언과 싸우는 서부 건맨이나 거기에 얽혀든 남군 북군의 패잔병 부대가 싸우는 모습을 꼭 닮았다. 정우성이 단연 돋보인다. 정우성이 장쯔이를 구하려고 뒤돌아 서는 듯 하다가 창을 날려 적의 머리통을 찍어 쓰러뜨리는 장면은, 예고편에서도 보지 못했고 다른 영화에서도 보지 못한 ‘전광석화’같은 속도감에 실감나는 탄성이 나왔다. 수없이 잔혹한 장면이 이 한 송이 꽃을 피워내기 위한 들러리 같았다. [무사]는 이 한 장면 말고는 볼 게 없다고 하면 좀 지나친 말일까?( 나는 정우성을 좋아한다. 귀공자 같은 고운 얼굴에 드리워진 깊은 그늘을 담고 내쏘는 싸늘한 눈빛이, 도시의 화려한 네온싸인 뒤로 숨어들어 어두운 골목길을 거니는 들개처럼 처연하게 외로워 보인다. 그의 갸름한 얼굴선과 얇은 입술이 그 외로움을 더욱 창백하게 만든다. ) 우리 나라 영화는 무엇보다 시나리오가 딸린다. ‘우리 사람 좋은 사람’이라는 ‘유치한 애국심’을 보여주려는 괜한 욕심으로, 마을 주민을 억지로 끌어들인다. 스토리도 비비꼬이고 쓸데없는 장면과 대사가 군더더기로 잔뜩 들어간다. 그리고 마지막 싸움장면을 긴박함이 넘치는 속도감을 주질 못하고, 오뉴월 소불알 늘어지듯 축축 늘어뜨린다. 이런 영화를 2시간 반이나 끌 필요가 없다. 맨 앞부분을 한 5분쯤 늘리고, 뒷부분을 30분 넘게 잘라 냈어야 했다. 그러면 영화가 훨씬 단정하고 속도감을 가지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무사의 외로움을 비장미 넘치게 만들 수도 있었다. 한국 영화의 문제는 “돈을 많이 들이고 적게 들이고”라는 물량이나 말초적 감각을 자극하는 강도에 있지 않다. 문화적 뿌리에서 질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이 영화는 [단적비연수]처럼 전혀 별 볼 일 없는 영화는 아니지만, 그리 별 볼 일 있는 영화도 아니다. 한국 영화에 찾아온 모처럼의 기회를, 그저 그렇고 그런 이런 정도의 영화로 말아먹어 버릴지도 모르겠다는 불안감을 떨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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