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누정(8) 벽류정(碧流亭)
나주 누정(8) 벽류정(碧流亭)
  • 나천수 (사)호남지방문헌연구소 전문위원
  • 승인 2017.11.16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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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시 세지면 벽산리 벽류정 마을에 있는 단아한 누정

벽류정(碧流亭)은 나주시 세지면 벽산리 벽류정 마을에 있다. 단층 팔(八)자 기와지붕에 정면3칸, 측면 3칸으로, 가운데 중재실(中齋室)에 온돌방이 있는 단아한 누정이다. 이 누정은 1992년 11월 30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기념물 제184호로 지정되었다.

이 곳은 본래 1429년에 문과 급제하여 호조참판을 지낸 도강인 조주(道康人 趙注)가 이곳에 은거하면서 지은 별서(別墅)가 있었던 터이다. 그러나 외손인 광산김씨 집안에 물려주어 이후에 김해부사를 지낸 김운해(金運海)의 소유가 되었다. 이 터에 김운해가 1640년(인조8)에 벽류정을 건립하였다. 그 후 1678년(숙종4), 1862년(철종13), 1998년에 중수와 수리를 거듭하였다. 참고로 김운해는 1608년 무과급제를 한 무인이다.

▲황사 민규호의 필체
▲위당 신헌의 필체

벽류정(碧流亭)에는 황사(黃史) 민규호(閔奎鎬, 1836~1876)와 신헌(申櫶, 1811~1884) 그리고 김민국(金珉國) 등이 각각 쓴 3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민규호는 예조판서와 이조판서를 역임하였고 당시에 서예에 능한 인물로 꼽힌다. 또한 신헌은 전라우도수군절도사·봉산군수·전라도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1849년에는 금위대장(禁衛大將)에 올랐다. 고종 초기는 대원군의 신임을 받아 형조·병조·공조판서를 역임한 인물이다.

벽류정을 중수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벽류정중수기>(碧流亭重修記)는 1678년에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이 썼다. 이 때 김수항은 숙종 즉위 후 허적·윤휴(尹鑴)를 배척하고, 추문을 들어 종실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 형제의 처벌을 주장하다가 집권파인 남인의 미움을 받아 영암 구림으로 유배를 와 있을 때였다.

<벽류정중수기>에는 “안동김씨인 청음 김상헌이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압송되어 6년 후에 풀려 귀국 길에 용만(龍灣, 의주)에 있을 때, 나주의 김운해가 천리 먼 거리인 용만으로 가서 문안 인사를 드렸다는 것을 알고 있어, ‘김운해는 ‘의기(意氣)의 사람이다’라고 칭찬하였다. 그 후 김운해가 작고하고, 내가 낭주(朗州, 영암)에 유배와 있을 때, 그의 직손인 상현(尙炫)과 상준(尙焌)이 찾아와 벽류정 중수의 기문을 청하였다.” (중략) “누정은 본래 우리 조선에서 참판을 지낸 조주(趙注)의 별장으로 외손에게 전해져 김운해의 소유가 되었다. 벽류는 바로 그의 옛 아호(雅號)라고 한다” 라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1678년 유배 중인 김수항을 찾아가 벽류정의 중수기를 청탁한 내용과 벽류정이 세워진 경위를 살필 수 있다. 이후 1862년에는 누정을 개축하면서 벽류정의 상량문은 여력재 장헌주가 짓고, 중수기는 영건도유사 김성보(金聲普)가 썼다. 10세손인 김기숙(金琪淑)이 쓴 《벽류정중수기》를 통해 1922년(임술)에 한 번 더 중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참고로 김기숙의 문집으로는 《춘재유고(春齋遺稿)》가 있다.

▲문곡 김수향의 벽류정중수기
▲김기숙의 벽류정중수기

현재 벽류정에는 김순택(金淳澤)이 지은 시가 원운시로 걸려 있다. 김순택은 최근 인물로, 최근 인물이 원운시를 지었다는 말은 맞지 않다. 사실 벽류정의 주인인 김운해가 지은 시가 원운시가 되어야 맞는데, 불행하게도 김운해가 지은 원운시는 전하지 않는다.

세지면에 살고 있는 전 나주향교 전교를 하셨던 김성두(金成斗)는 “후손인 김순택이 선조인 김운해의 원운시가 전하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자신이 시를 지어 원운시로 하였다”고 증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뜻이 있다고 하더라도 김순택의 작품이 원운시가 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며, 이에 대한 부연 설명이 필요할 듯하다.

원운시의 운은 유(流), 유(遊) 두(頭) 유(留), 추(秋)이다. 이 운으로 시를 지은 이는 8세손 김정룡(金楨龍, 1846~?), 10세손 김기숙(金琪淑, 1868~1945), 김순택(1925~?, 김기숙의 손자)이다.

현재 벽류정 후손 측에서 원운시로 게시한 김순택의 시를 살펴본다.

한 정자 지어놓고 푸른 물 내려다보며                                      構築一亭臨碧流

세상 근심 잊은 체 벗과 더불어 즐기네                                     却忘世慮與朋遊

벼슬길의 몇 날이나 이러니저러니 어지러웠는데                         紛紜幾日靑雲路

휴식하는 당년에는 머리가 백발 되었네                                    休息當年白髮頭

물러나 향촌에 누으니 마음 고요해지는 듯하나                           退臥鄕村心可靜

나라의 치욕 참기 어려워 부질없이 한스럽기만 하구나                  難湛國耻恨空留

인간 만사가 모두 일장춘몽으로 돌아가지만                               人間萬事皆歸夢

다시 봄가을로 책 읽기를 기약하네                                          更約讀書春又秋

▲김순택의 원운시

 

김순택은 근대 사람이지만 한학의 대가였던 것 같다. 이 시를 음미해 보면, 자신의 속마음을 표현한 것이 아니라, 먼 선조인 벽류정 주인인 김운해의 시심(詩心)을 자신이 대신 표현한 느낌이 든다. 김기현(金基炫, 1895-1966)의 《송오유고(松塢遺稿)》편찬에도 도움을 주었고, 춘재유고(春齋遺稿) 발문도 썼으며, 벽산리 산계정(山溪亭)에도 시운이 또한 게시된 것으로 보아 김순택의 문인 활동이 매우 넓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벽류정에는 시서(市西) 김선(金璇, 1568~1642), 남간(南磵) 나해봉(羅海鳳, 1584~1638), 임연(林堜, 1589~1648), 기정(棄井) 최정(崔珽, 1568~1639)의 시가 걸려 있다. 벽류정은 김운해가 1640년에 건립한 것으로, 김선, 나해봉, 최정, 임연은 김운해와 교유한 시우(詩友)들인 것으로 보인다. 남간 나해봉의 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기심(機心)을 버려야 바다 새와 함께 놀 수 있는데                忘機幾共海鳩遊

종일토록 들판을 건너는 나루터 배는 항상 비스듬히 있네.      盡日常橫野渡舟

언제라도 청동 되로 강가에서 술을 마시니                          銅斗何時飮江酒

그대와 더불어 이별의 시름과 어지러움 씻는구나.                 與君同滌亂離愁

이 시를 음미해 보면, 기심(機心)은 자기의 사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교묘하게 꾀하는 마음을 말한다. 고사(故事)를 보면 ‘바닷가에 사는 사람이 매일 아침 수백 마리의 물새와 벗하며 어울려 노닐었는데, 그의 부친이 자기가 데리고 놀 수 있도록 잡아 달라고 부탁하자, 그 다음 날 아침에는 한 마리도 내려와 앉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열자(列子)》<황제(黃帝)>에 나온다.

벽류정은 오늘날은 직강공사를 하여 강물의 형태가 변하였지만, 벽류정 바로 아래 영산강 지류가 감돌아 흐르고 있어 마치 언덕위에 지어진 벽류정에 올라가 있으면 벽류정은 배가 되어 들판을 건너는 모습 같다. 그 세지 들판을 건너는 벽류정이라는 배가 항상 비껴있다는 말이니, 시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던 것이다.

▲남간 나해봉의 시

나해봉의 시운을 보면 유(遊), 주(舟), 주(酒), 수(愁)이다. 이 운은 벽류정 시운인 유(流), 유(遊), 두(頭), 유(留), 추(秋)와 같은 운이라 할 수 있다. 이것으로 보아 김운해가 말년에 벽류정에서 시회(詩會)를 하면서 이와 같은 운의 시를 서로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지금까지 본 위원이 나주지역 8정의 겉모습과 숨은 이야기를 스토리텔링으로 엮어 내었다. 나주 지역뿐만 아니라 전라도 어느 시군에도 이처럼 지역을 대표하는 유명한 정자가 있는데, 이것이 관광자원화 되지 못한 것은 수직적‧수평적‧공간적 스토리텔링을 엮어내지 못한 것 때문이다. 마치 옥구슬은 있는데 이를 꿰지 못하여 목걸이를 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문화재 안내 간판을 한번 보자. 거의 대부분 문구가 지붕은 맞배니 팔작이니 하고, 기둥은 주심포니, 다포니 하고, 문짝은 연꽃무늬이니 하면서 그 겉모습에 치중하여 문안을 작성하니, 고건축을 배우는 사람이야 관심이 있겠지만, 일반 관광객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모든 관광물에는 사람의 향기가 숨겨져 있다. 이 사람의 역사적 향기를 스토리로 풀어내야 마침내 관광객이 눈길을 돌린다. 그렇지만 스토리 하나 단편작으로 끝나버리는 것도 부족하다. 그래서 한 핏줄로 이은 스토리텔링이 필요한 것이다. 대전의 ‘전국 성씨 공원’은 기반 조성은 자치단체가 하고 기념물 조성은 해당 성씨 측에서 하였다. 그런데 오늘날 보면 유료 입장을 시키는데도 연중 수많은 관광객에 찾아가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핏줄이라는 스토리텔링이 있기 때문이다. 핏줄은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을 이어주는 끊으래야 끊을 수 없는 밧줄이다.

때마침 깨어 있는 언론사 <시민의소리>가 광주 담양을 시작으로 광주권의 이름난 누정을 학술적으로 한꺼풀 더 깊이 조사하고, 한문으로 된 시와 기문을 번역하여 보배 같은 책자를 만든다 하니, 이것이 장기적으로는 ‘문화로 일구는 향부(鄕富)의 자원’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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