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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누정(5) 만호정(挽湖亭)오랜 역사의 흔적을 간직한 만호정
나천수 (사)호남지방문헌연구소 전문위원  |  siminsori@siminsor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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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10.26  10:5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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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호정 현판

만호정(挽湖亭)은 나주시 봉황면 철천리 철야마을에 있으며, 전남도 유형문화재 문화재 기념물 제145호로 1992년도에 지정되었다. 건물구조는 팔작지붕에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사방이 탁 트인 대청형 구조이다. 현 위치의 북쪽에 있는 연포(鷰浦)에 고려조 때에 세운 쾌심정(快心亭)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나 축조연대를 고증할 문헌이 없어 확인할 수가 없다. 다만 게시된 편액의 글을 통해서 신라, 고려 때에도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만호정에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듯 그 이름을 달리한 5점의 누정 중수기가 각각 편액되어 걸려있다. 1930년 정도홍(鄭燾洪, 1878~1951)의 <쾌심정 중수기(快心亭 重修記)> 등을 통해 이 누정은 고려 때부터 있었으며, 최초에는 원일정(遠日亭)으로 불리어지다가, 무송정(茂松亭), 쾌심정(快心亭), 영평정(永平亭) 그리고 만호정(挽湖亭)으로 누정의 명칭을 달리하였음을 알 수 있다. 거기에는 “임진왜란 때에 병화를 입어 현재의 장소로 이건 재축하면서 누정을 영평정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지난 세월의 쾌심정을 돌이켜보며 수계활동이 이루어졌다”라는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 만호정

또한 철야마을에 소재한 만호정에서 계를 만들어 운영하였던 내용도 언급되어 있다. 그 내용을 일부를 보면 “철야(鐵冶)라는 이 동네는 우리 고을의 큰 마을이다. 원래 예의를 숭상한 풍속이 있기 때문에 이미 오래전부터 마을의 계(禊)를 만들어 서로 간에 정의(情誼)를 두텁게 하는 행락(行樂)의 모임을 가지었다.(중략) 옛날 나의 종증조 판서공[判書公, 서지(徐祉, 1468-1537)]을 비롯한 족조 진사공[進士公, 서척(徐滌)], 숙부 진사공[進士公, 서눌(徐訥)]이 연이어 태어나 이 누정에 대한 창시 및 중수 등의 모든 역할을 하면서 별도의 규약을 만들어 영구보존의 기초를 다졌다”라는 내용이 있다. 참고로 철야 마을은 예로부터 서씨와 정씨가 마을 구성원이 되어 서로 혼인하였는데, 이 때문에 정도홍은 위의 세 사람을 종증조, 족조, 숙부라 칭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 금하장학회의 사무국장을 역임하고 있는 서정도의 말에 의하면, 철야(鐵冶) 마을은 ‘철(鐵)을 야금(冶金)한다’는 말로, 실제로는 철야마을 앞길은 과거 서울 가는 길로 마동이라는 말 발굽쇠를 바꾸는 곳이 있어서 철야로 불리었다고 한다. 당시에 일제(日帝)가 1910년부터 이 땅을 측량하면서 철야라는 뜻이 철을 야금한다는 말로 이해하고, 그 철이 빨리 녹슬도록 물을 뜻하는 내 천(川)자를 넣어 철천리(鐵川里)로 바꾸어 버렸다고 하였다. 그 후 철야마을은 지명에 쇠못을 꽂은 철천리가 법정동명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어디 이 지역뿐이겠는가?

   
▲ 정도홍의 쾌심정중수기(快心亭重修記)

<쾌심정중수기>에는 “쾌심정에서의 수계(修禊)는 임진왜란 이후에 중단되었으며 정유재란 때에도 수계의 모임을 가질 수 없었다.(중략) 이에 향북당 정준일(向北堂 鄭遵一, 1547~1618)이 옛날의 이러한 유업을 다시 일으키기 위한 모든 노력을 하였다.(중략) 금년(1930년) 가을에 여러 동인(洞人)들이 중론을 모아 이 누정을 언덕 사이로 이건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복구공사를 시작하여 빠른 시간에 완성을 하였다. 이 누정의 낙성식과 중양절 연회가 맞물려 거의 3천여 명의 계원(禊員)이 모여 큰 성황을 이루었다.(중략) 다만 이 누정의 옛날 이름이 쾌심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그 이름을 따르는 것이 당연의 일이라 할지라도 이미 옛날의 그 터가 아닌 새 자리에 오늘의 이 누정을 지었기 때문에 그 이름에 있어서도 새 이름을 붙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하여, 이 고을이 별호(別號)인 영평(永平)이라는 두 글자로 이 누정의 이름을 정하게 된 것이다”라는 내용이 있어 쾌심정에서 영평정으로 명명한 연유를 알 수 있다.

정준일은 남평출신으로, 임진왜란 당시 제봉 고경명 선생이 초토사(招討使)가 되어 의병을 일으키자 합세하여 맏아들 정현(鄭晛)과 조카 정사(鄭賜) 등과 함께 종군하였으며 금산(錦山) 전투에 참전하였던 인물이다.

   
▲ 정철환의 만호정기 병제(挽湖亭記幷題)

1967년 영평정을 중수한지 37년이 지난 후에 또 다시 누정을 보수하고 명칭을 영평에서 만호(挽湖)로 바꾸는 사실은 만호정기병제(挽湖亭記幷題)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글은 1967년에 정철환(鄭喆煥), 여창현(呂昌鉉), 홍석희(洪錫憙)가, 1971년에 서요(徐鐃)가 각각 썼다. 이 네 사람이 쓴 기문의 말미에는 ‘병제(幷題)’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동일한 강(岡), 향(鄕), 장(長), 상(桑), 향(香)을 운으로 하는 축시가 있으며, 이를 차운한 시가 축하객들에 의해 다수 창작되었다. 다만 4년 후인 1971년에 기문을 쓴 서요의 시의 운자는 강(岡), 향(鄕), 당(當), 상(桑), 상(霜)으로 조금은 다르다.

만호정을 중수한 1967년에 봉황면장이었던 정철환의 <만호정기병제>를 살펴보면 “누정에는 예로부터 10가지 조목의 향약이 있었으나 한결같게 백록동 규약(白鹿洞規約)과 남전향약(藍田鄕約)에 의지하였다. 그리고 또한 팔경이 있었는데 덕룡산의 갠 달빛(龍山霽月), 금성산의 저물녘 노을(錦城晩霞), 매 봉우리의 아침햇살(鷹峰朝陽), 여우 고개의 저녁노을(狐峴落照), 수정의 맑은 바람(藪亭淸風), 연포로 돌아가는 돛배(鷰浦歸帆), 옥등에서 타는 거문고(玉嶝彈琴), 웅사의 저녁 종소리(熊寺暮鍾)이다”라 하였다.(중략) “마을의 여러 유생 중에 금하 서상록(錦下 徐相錄)은 우리 마을의 인망(人望)인데 이미 창고와 돈주머니를 기우려 향토 사업에 수고로움을 다하였다. 또 이 누정이 날이 갈수록 황량해지는 것을 개탄하여 큰돈을 투자하여 전깃불을 가설하고, 이어서 국내 명문가의 시문을 모아서 그 문미를 화려하게 하며, 오래도록 전하고자 한 점은 그 뜻이 근면한 것이니 또한 기록으로 남기지 않을 수 없었다”라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말미에 7언 율시의 시를 남겼다.

만호정 우뚝 솟아 덕룡산 누르고                                  湖亭突兀壓龍岡

산과 물 호남의 제일 고향이라네                                  山水南來第一鄕

서씨 아이 정씨 장정의 풍치 고풍스러운데                      徐孺鄭莊風韻古

신라 누각 고려 나무 세월 갈수록 화려하네                     羅坮麗樹歲華長

고관대직으로 백세 보내니 문하생 번성하고                    簪纓百世蕃桃李

밭 갈고 베를 짜며 온 집안 뽕밭에서 늙어가네                 畊織千家老柘桑

큰 전란 넘어간 마을을 수호하는 느릅나무                      護社枌楡經浩㥘

지금까지 꽃과 잎사귀 향기 뜨락에 가득하네                   至今花葉滿庭香

   
▲ 편액되어 걸려 있는 편액 모습

현재 만호정에는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남긴 축시가 편액되어 걸려있다. 위의 기문에서 금하 서상록(錦下 徐相錄, 1910-1996)이 재정지원을 다하였다고 언급하였다. 이 사람은 만호정이 있는 철야(鐵冶)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에서 이천금속공작소(利川金屬工作所)라는 공장을 설립하여 소위 성공한 기업인으로 평가 받는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이천서씨(利川徐氏)를 뜻하는 이천금속공작소를 간판으로 내걸었다는 것은 서상록의 애국심 또는 조선인의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해방 후 이승만 정권 때에 상공부 장관을 맡아 달라고 할 정도로 신임을 받았으나, 기업인은 기업에 전념해야 한다는 소신으로 장관직 수락을 하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는 해방 후에 마산에 방직공장, 인천에 이천전기 공장을 설립 운영하여 조국의 근대화에 노력하였다. 특히 고향인 나주 발전을 위해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철야마을 진입로는 사재로 건설하여 군(郡)에 기부채납하고, 철야마을 전기가설을 지원하여 전국 최초로 리(里) 단위에 전기가 공급되게 했다. 해방 후 전화 가설이 어려울 때 마을에 공동으로 쓰는 전화기를 설치해 주었으며, 금하장학회를 만들어 1975년부터 현재까지 계속 장학금지원을 하여, 지원액이 누계로 55억 원에 달하며, 나주 남산 공원에 금하회관을 건립하여 군(郡)에 기부채납하여 나주시 개청 때에는 시(市) 청사로도 활용하기도 하였다.

당시의 만호정 보수와 낙성에 따른 재정적 비용 일체에 대한 그의 적극적인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그의 업적을 기념하기 위한 축시 한수를 비롯한 5편의 중수기 및 14점에 편액된 71수의 작품이 편액되어 걸려있다.

   
▲ 서상록의 작품

서상록은 철(鐵)의 마을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철(鐵)로 성공한 기업인이 되어 우리나라와 고향에 철(鐵, 쇠푼=돈=재정)로써 지원하였으니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다. 그도 서당에서 공부를 하여 한자의 문리(文理)를 터득하였다고 하는데, 그의 시를 살펴본다.

거울로 호수 삼고 옥으로 언덕 삼으니                           鏡以爲湖玉以岡

영평정이 영평고을을 진압하였네                                 永平亭鎭永平鄕

높은 관직의 옛 고을 명성이 유구하고                           簪纓故邑風聲遠

도리1)의 명문가 음덕 장구하네                                   桃李名門德蔭長

시와 술을 하는 기영2)이 오늘의 낙사3)이고                    詩酒耆英今洛社

전원에서의 은둔함은 옛 도연명이네                              田園遺逸古柴桑

한 숲의 나무 하나도 천금같이 중하거늘                         一林一木千金重

가장 애련한 것은 선인들 떠난 후 향기네                        最愛前人去後香

만호정은 고려 때의 원일정(遠日亭)에서 오늘날 만호정(挽湖亭)으로 이어오면서 개축과 보수를 거듭하는 중에 쓸 만한 옛 기둥이나 널빤지를 재사용하였다. 약 1천여 년이나 된 오래된 “나무의 해골(?)”이 어떤 모습인지를 그곳에서는 쉽게 볼 수 있다.

그리고 누정의 명칭은 대체로 그 당시 마을의 지향점을 잘 나타내고 있는 듯하다. 최초 ‘원일(遠日)’은 먼 날인데, 《예기》 〈곡례(曲禮)〉에 이르기를, “상사에는 먼 날을 먼저 점치고, 길사에는 가까운 날을 먼저 점친다[상사선원일 길사선근일(喪事先遠日 吉事先近日)]라는 글로 보아 누정은 공동으로 장례를 치르는 곳으로 활용된 듯하고, 무송(茂松)은 당시에 소나무가 우거진듯하며, ‘쾌심(快心)’은 마음을 상쾌히 하는 곳이란 뜻이고, 영평(永平)은 영세화평(永世和平)을 뜻하니 전쟁이 없기를 바라는 뜻이고, 만호(挽湖)는 호수를 끌어당긴다는 뜻이니 연포(鷰浦)에 있었던 누정을 중아(中阿, 언덕 가운데)로 이건(移建)하였기에 배산임수(背山臨水) 모양을 갖추려고 그리 지은 듯하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듯 많은 이름을 가진 만호정이 자리한 봉황면(鳳凰面)의 봉황은 임금의 기운이 솟는 곳이다. 그 기운으로 이웃 산포면에 혁신도시가 들어서고, 천년동안 개벽할 정도의 변화를 단 몇 년에 끝내버렸다. 이 봉황의 기운과 철야(鐵冶)의 쇳덩이 기운이 아직 살아 있다면 언젠가는 그 기운이 만호정에 싹트지 않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설렌다.

1) 도리 : 훌륭한 문생이나 천거한 현재(賢才)를 말한다. 당(唐)의 적인걸(狄人傑)은 일찍이 요원숭(姚元崇)ㆍ환언범(桓彦範) 등의 많은 인재를 천거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그에게 “천하의 도리가 모두 공(公)의 문하에 있다.〔桃李滿天下〕”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資治通鑑 唐紀》

2) 기영 : 송나라 때 문언박(文彦博), 부필(富弼), 사마광(司馬光) 등 낙양의 나이가 많은 자 13명이 모여서 술을 마시면서 서로 즐긴 낙양기영회(洛陽耆英會)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기로회(耆老會)를 가리킨 듯하다.

3) 낙사 : 북송(北宋)의 문언박(文彦博)이 사마광(司馬光)ㆍ부필(富弼) 등 13인과 함께 백거이(白居易)의 구로회(九老會)를 모방하여 만든 모임인 낙양기영회(洛陽耆英會)를 말한다. 여기서는 서씨 정씨의 명류들이 모였음을 비겨 말한 듯하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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