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공원 C-47 수송기의 사연을 아시나요
여의도공원 C-47 수송기의 사연을 아시나요
  • 류승희 시민기자
  • 승인 2017.06.29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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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장준하 등 임정요인 개인자격 싣고 온 아픔 간직
날지 못한 72년…영원히 한국인 가슴속 비상했으면

1945년 8월18일 경성비행장(현 여의도공항)에 비행기 한 대가 내려앉았다. C-47수송기였다. 비행기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광복군 정진대원 이범석·김준엽·노능서·장준하가 타고 있었다.

이들은 이날 새벽, 미군 전략정보처 OSS대원 18명과 동행하여 시안(西安)비행장을 이륙했다. 여의도 공항 활주로 끝에 멈춘 비행기에서 광복군 정진대와 미군이 내리자 착검을 한 일본군이 포위망을 형성하면서 좁혀왔다.

일왕 히로히토가 포츠담선언(항복)을 수락한 지 사흘이나 지난 8월 18일 오후였지만 여전히 한반도는 일제가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8·15이후 한국인의 봉기를 우려해서 도리어 치안권을 강화한 상황이었다. 미군은 연합군 포로와 접견을 요구했으나 일본군은 거절했다.

대화가 막히자 일본군은 탱크 두 대를 끌고 나오고 활주로에 박격포를 배치했다. 이튿날 새벽 경성비행장 책임자 시브자와 대좌와 우에다 히데오 소좌가 맥주와 사케통을 들고 일본군막사에서 대기하던 이범석·김준엽·노능서·장준하를 찾아 무릎을 끊고 술을 권했다.

장준하는 이날 평생 처음 술을 마셨다. 일본군이 광복군에게 항복의 예를 취한 오직 한 번의 술잔이었다. 긴 실랑이 끝에 비행기는 이튿날 평양서 가져온 휘발유를 채우고 그대로 이륙할 수밖에 없었다.

다시 1945년 11월23일. 상하이 강만비행장을 떠난 C-47수송기에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부주석 김규식, 국무위원 이시영, 장준하 등 15명이 타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아니라 개인자격으로 조국을 향하고 있었다.

고국 땅을 떠나 30년, 40년씩 독립운동을 하다 귀국한 임정요인들의 심정을 어떠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수많은 환영인파, 조선 민중들의 환호, 가슴 벅찬 감동의 물결을 떠올렸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장준하선생의 「돌베개」를 열어보자. “우리는 김포비행장이라는 벌판위에서…이제 조국에 돌아왔다. 곧 땅을 밞고 그리운 동포의 그 표정을 보리라.(…)시야에 들어온 것을 벌판뿐이었다. 일행이 한사람씩 내렸을 때 우리를 맞이하는 것은 미군 GI들뿐. 나의 조국이 이렇게 황량한 것이었는가. 우리가 갈망한 고토가 이렇게 차가운 것인가(…)나부끼는 태극기, 환성의 환영, 그 목아프게 불러줄 만세소린 환상으로 저만치 물러나있고 거무푸레한 김포의 하오가 우리를 외면하고 있었다.”(P338)

그로부터 72년. 여전히 대한민국을 둘러싼 국제현실은 장준하 선생이 목도한 그 시절과 별반 다르지 않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자격을 인정받지 못하고 개인자격으로 쓸쓸히 귀국해야했던 70여 년 전의 외교현실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비행기내부를 찾은 30대 남녀 한 쌍의 한마디. “무심히 지나쳤던 비행기에 이런 사연이 담겨있는지 몰랐네.”

바람 부는 날에는 여의도 공원에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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