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32) 간화음(看花吟)
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32) 간화음(看花吟)
  •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 승인 2017.06.07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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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샘물은 돌부리를 서서히 양치질하고 있네

남자라고 기풍 당당한 시만 쓸 수는 없는 법이다. 성격에 따라서, 시풍에 따라서, 주위 친지들의 분위기에 따라서 얼마든지 내용의 섬세함은 달라질 수 있다. 대체적으로 남자는 남아(男兒)답게, 여인네들은 정숙한 여인답게 시적인 감흥을 불러일으키게 된다고 한다. 살다보면, 또 돌아보면 맞는 말이다. 여기에서는 고려 삼은으로 일컬어지는 한 분의 시를 주 텍스트로 삼아보았다. 그의 시풍을 두고 세인들은 여성스럽다고 말한다. 그의 섬세한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看花吟(간화음) / 도은 이숭인

붉은 단풍 시골길 환하게 밝혀주고

맑은 샘물 돌부리 양치질로 닦아내니

오가는 거마 없어도 산기운이 황혼에.

赤葉明村逕            淸泉漱石根

적엽명촌경            청천수석근

地偏車馬少            山氣自黃昏

지편거마소            산기자황혼

 

맑은 샘물은 돌부리를 서서히 양치질하고 있네(看花吟)로 번역해 본 칠언절구다. 작자는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1349~1392)이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붉은 단풍은 시골길을 환하게 밝혀주고 // 맑은 샘물은 돌부리를 사각사각 양치질하고 있네 // 외진 곳이라 오고 가는 거마는 찾아 볼 수가 없고 // 산 기운은 저절로 황혼에 물들어 가고 있네]라고 번역된다.

위 시제는 [꽃을 보면서 읊음]으로 번역된다. 정도전의 시는 스케일이 크고 활달하다면, 이숭인의 시는 섬세하고 정교한 맛이 나서 미감의 차이가 난다. 정도전이 ‘사방 산이 비었다[四山空]’거나 ‘온 땅 가득 붉다[滿地紅]’라고 표현한 것과 비교해 이숭인이 ‘돌 뿌리를 양치질하듯 씻어준다[漱石根]’라고 한 표현을 볼 때, 그렇다는 말이다.

시인은 단풍과 맑은 샘물에 대한 이미지를 새롭게 한다. 붉은 단풍은 시골길을 환히 밝혀주고, 맑은 샘물은 돌부리를 사각사각 양치질하고 있다고 했다. 가을 경치의 아름다움을 노래하여 시인의 한적(閑適)과 고적(孤寂)을 전달해준다는 점에서 시인의 시적인 의경(意境)이 보인다.

맑은 샘물이 돌부리를 양치질한다는 표현이나, 산 기운은 황혼에 물들고 있다는 표현은 절묘한 가구(佳句)다. 이는 삶의 어려운 국면에서도 위축되지 말고 마음의 안정과 여유를 지니라는 언외(言外)의 가르침을 준다. 단풍이 들기 전 서둘러 밀린 일을 정리하고 자연이 한 해 동안 준비해 온 꿈속 같은 가을 풍경화 속에 잠시 들어가 보게 된다. 여기에서도 정도전의 ‘방김거사야거’와 시의 특성이 비교될 수 있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붉은 단풍 밝혀주고 맑은 샘물 양치질을, 오간 거마 볼 수 없고 황혼에 물든 산 기운’이라는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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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1347~1392)으로 고려 말, 조선 초의 학자이다. 밀직제학에 임명되어 정당문학 정몽주와 더불어 실록 편찬사업에 뛰어들어 <고려실록>을 편찬하는데 공헌했다. 성리학에 조예가 깊고, 특히 시문에 이름이 높았다. 저서에 [도은집]이 전한다.

【한자와 어구】

赤葉: 붉은 잎, 곧 붉은 단풍. 明: 밝다. 밝히다. 村逕: 시골의 아담한 오솔길. 淸泉: 맑은 물. 漱: 양치질하다. 石根: 돌 뿌리. // 地偏: 외진 곳, 땅의 저쪽 다른 끝. 車馬: 수레와 말. 少: 적다, 곧 인적이 드물다. 山氣: 산 기운. 산의 화창한 기운. 自: 저절로. 黃昏: 황혼, 해질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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