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27) 방김거사야거(訪金居士野居)
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27) 방김거사야거(訪金居士野居)
  •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 승인 2017.05.03 22: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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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내 몸이 그림 속에 있는 것은 아닐런지

흔히 문사철(文史哲)이라고 했다. 문학과 역사와 철학은 문학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상보적인 관계를 갖고 넘나든다는 뜻이다.

정객들 대부분은 모두가 시문과 역사에 능했다. 동지를 만나도, 친지를 만나도, 대화가 통하는 여인을 만나도 거침없이 시문을 수창(酬唱)했다. 조선개국의 일등공신인 정객(政客)의 한 사람이었지만 한국화 한 폭을 그리듯이 문학적 상상력으로 일궈 낸 시 한 편을 만난다. 마지막 결구에서 시인의 상상력을 만나는 멋진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訪金居士野居(방김거사야거) / 삼봉 정도전

가을 구름 몽실 몽실 사방 산은 고적한데

소리 없이 지는 잎들 온 땅 가득 붉었어라

말 세워 갈 길 묻노니 그림 속이 내 몸인가.

秋陰漠漠四山空         落葉無聲滿地紅

추음막막사산공         락엽무성만지홍

立馬溪橋問歸路         不知身在畫圖中

입마계교문귀로         불지신재화도중

 

이 내 몸이 그림 속에 있는 것은 아닐런지(訪金居士野居)로 제목을 붙여본 칠언절구다. 저자는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1342~1398)이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가을 구름 몽실몽실 사방 산은 고적한데 // 소리 없이 지는 잎들 온 땅에 가득하게 붉어라 // 시내 다리에서 말을 세우고 돌아갈 길을 묻노라니 // 이 내 몸이 그림 속에 있는 것은 아닐런지]라고 번역된다.

위 시제는 [들에 사는 김 거사를 찾아서]로 번역된다. 김 거사가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전라도 나주 인근에 사는 어떤 식자로 추정된다. 삼봉이 34~36세 시절이다. 삼봉은 이인임을 필두로 한 친원파의 세력에 눌려 전라도 나주의 회진현 거평부곡에 속한 소재동(消災洞)에서 3년간 귀양살이를 했다고 전한다. 그 때 쓴 시 28수가 [금남잡영(錦南雜詠)]에 묶여 있다.

시인은 김 거사를 방문하고 돌아가는 길이다. 찾아 올 때에는 집을 찾느라 보지 못한 늦가을 오후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쪽빛 하늘에는 비늘구름이 몽실몽실 떠 있고 사이의 산은 인적이 없이 텅 빈 듯 고요했으리라. 바람 없는 적막 속에 한 잎 두 잎 소리 없이 낙엽은 지고 있다. [아, 어느새 단풍이 수북이 쌓인 만추의 한 가운데에 내가 오뚝이 서 있구나]하는 탄성을 자아도 냈을 것이다.

화자는 한 폭의 그림 속에 홀린 듯이 말을 타고 들어온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시내 다리에서 말을 세우고 돌아갈 길을 묻는다고 했으니 몸이 그림 속에 있는 것은 아닐런지 모르겠다고도 했다. 그리 보면 ‘김 거사는 화중지인(畵中之人)이 아닌가!’라고 하면서…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가을 구름 사방 산에 지는 잎들 온 땅 가득, 말 세우고 길 물으니 그림 속에 이 내 몸이’라는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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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1398)으로 고려말 조선초의 정치가, 학자이다. 이색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정몽주·박상충·박의중·이숭인·이존오·김구용·김제안·윤소종 등과 교유했으며, 문장이 왕양혼후해 동료 사우의 추양을 받았다. 1360년(공민왕 9) 성균시에 합격하였다.

【한자와 어구】

秋陰: 가을의 구름 낀 하늘. 漠漠: 몽실몽실하다. 空: 한적하다, 고적하다. 落葉: 낙엽. 無聲: 소리 없다. 滿地紅: 온 땅이 가득 붉다. // 立馬: 달리던 말을 세우다. 溪橋: 시내 다리. 問歸路: 돌아갈 길을 묻다. 不知: 알지 못하겠네. 身在: 몸이 ~에 있다. 畫圖中: 그림 가운데. 혹은 몸이 그림 가운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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