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19) 천거(遷居)
한시 향 머금은 번안시조(19) 천거(遷居)
  •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 승인 2017.03.08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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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성현의 경전만 수레에 가득하네

예나 이제나 학문하는 사람들의 대체적인 성향은 책 속에 ‘푹’ 묻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연과학이나 사회과학을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인문과학을 하는 사람들에겐 ‘쌓이는 것이 책이다’는 볼멘소리를 듣는다. 맞는 말이다. 문사철이라고 했으니 문학, 철학, 사학의 책은 봇물이 쏟아지도록 쌓였으니 할 말은 없으리. 고려의 한 선비도 예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막상 이사를 하려고 하니 경전이 수레에 한 짐이었다고 읊은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遷居(천거) / 졸옹 최해

평생의 자기 사업 잘못됨은 선비인데

자신을 도모함이 졸렬하고 엉성했네,

경전이 수레 가득히 걱정할게 무엇인가.

平生業已誤爲儒          是處謀身拙且疎

평생업이오위유          시처모신졸차소

莫怪遷居無物載          聖賢經典尙盈車

막괴천거무물재          성현경전상영거

 

‘오히려 성현의 경전만이 수레에 가득하네(薦居)’로 제목을 붙여본 칠언절구다. 작자는 졸옹(拙翁) 최해(崔瀣:1287~1340)다. 위 한시 원문을 번역하면 [평생에 계획한 사업은 잘못 선비가 된 것 / 이곳에서 자신을 도모함에 졸렬하고 엉성했구나 // 이사를 하는데 실은 물건이 없다고 괴이하게 여기지들 말게 / 나의 성현 경전만이 오히려 수레에 가득하다]라고 번역된다.

위 시제는 [거처를 옮기며. 곧 이사하며]로 번역된다. 자신의 아호를 ‘옹졸한 늙은이’로 했던 것만 보아도 무언가 잘못 선택한 인생을 후회하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든다. 아호야 그렇다손 치더라도 선비된 자체까지를 후회하는 것은 아니다고 보여진다. 고려에서 벼슬을 하고 원나라에 가서 과거에 합격한 것으로 보아 출중한 재주를 가진 분이지만 만년이 불우했다는 행적을 보아서도 쉽게 짐작할 수가 있어 보인다.

시인이 이 시를 만년에 쓴 것으로 보이며 지난날을 뉘우치며 회환에 젖는 모습도 찾아내게 된다. 평생에 계획한 사업은 잘못 선비가 된 것 이곳에서 자신을 도모함에 졸렬하고 엉성하다고 했다. 곧 평생의 사업이 잘못된 것이라는 표현에서 그렇다. 그러면서 자신이 졸렬했음을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엿본다.

화자가 가지고 있는 살림이란 건 별로 없었음을 자인한다. 이사를 하는데 살림살이 물건이 없다고 괴이하게 여기지 말라고 하는 대화의 상대는 없어 보이지만 누군가를 향해서 부르짖는다. 이는 자신에게 한 이야기인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성현의 책만이 한 수레임을 강조하면서 다소의 위안이나마 삼게 된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평생 잘못 선비된 일 졸렬하고 엉성했네, 이사 물건 없지 않네 성현 경전 수레 가득’이라는 시인의 상상력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 장희구 시조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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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졸옹(拙翁) 최해(崔瀣:1287∼1340)로 고려 말의 문인이다. 원나라에서 귀국 후 예문응교·검교·성균관대사성이 되어 이름을 떨쳤다. 말년에는 사자갑사의 밭을 빌려서 농사를 지으며 저술에만 힘을 썼다. 평생을 시와 술로 벗을 삼고, 이제현·민사평과 가까이 사귀었던 인물이다.

【한자와 어구】

平生業: 평생의 사업. 已誤爲儒: 선비가 된 것이 이미 잘못되었다. 是處: 이곳에서. 謀身: 자신을 도모하다. 拙且疎: 졸렬하고 옹졸했다. // 莫怪: 기이할 것이 없다. 遷居: 이사하다. 無物載: 실을 물건이 없다. 聖賢: 성인과 현인. 經典: 종교의 교리를 적은 책. 尙: 오히려. 盈: 가득 차다. 車: 수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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