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문명과 인류의 미래①
유교문명과 인류의 미래①
  • 이황 만암주역학연구소 소장
  • 승인 2017.02.15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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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황 만암주역학연구소 소장

여성들만의 모임으로 인문학과 예술을 추구하는 인문학당을 만들겠다고 하며 학당의 이름을 지어줄 것을 요청받았다. 그래서 ‘문질여회(文質女會)’라 작명하였다. ‘문질’이란 말은 『논어 · 옹야편』에 나오는 말이다. 즉 실질이 문채를 능가하면 투박하고 거칠며, 문채가 실질을 능가하면 판박이가 된다. 문과 질이 조화를 이루면 군자인 것이다(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 然後君子)

문(文)이란 문채, 즉 겉으로 드러나는 품격 같은 것으로, 이것이 지나치면 사(史)라 하여 교양적이고 세련되기는 하나 화려하거나 형식에 치우친다는 뜻이 되고, 질(質)은 질박하고 투박하며 이것이 지나치면 야(野)라 하여 야성이 있고 개성이 있는 것으로 개성 있는 내면의 모습으로 야인(野人)의 모습이다. 예술가들의 독특한 개성미라고도 할 수 있다.

지난해 광주비엔날레 때 어느 중앙 일간지에 영국인이 쓴 칼럼에 나온 글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영국 런던공항에서는 밖에 나가보지 않으면 날씨를 알 수 없다. 그러나 한국의 인천공항에서는 밖에 나가보지 않고 한국인들의 옷차림만 봐도 밖에 날씨를 알 수 있다. 그래서 한국인은 예능인은 많아도 위대한 예술가는 나오기 힘들 것이다.” 한국인은 개성이 없고 맹목적으로 유행에 따르므로 획일적이라는 말이다. 아주 예리한 관찰력이다. 필자는 그의 주장에 100% 동의하며, 그래서 ‘문질’이란 말이 더욱 절실하다.

이렇게 지어진 ‘문질여회’의 이름으로 첫 모임이 지난 11일 정월 대보름날 있었고, 기념강의까지 하게 되었다. 당연히 필자의 강의 주제는 동양철학이었다. “오늘의 유학전통, 유교문명은 인류의 미래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강의 요지를 여기에 옮겨본다.

서구의 ‘계몽주의 운동’의 결과로 인류는 자유민주주의라는 가장 대단해 보이는 체제로 발전(?)한 것처럼 진행하여 오늘에 이른지가 고작 35년 정도에 불과하다. 동독의 몰락에서 소련의 붕괴를 거쳐 오늘에 이른 과정이다. 이를 프란시스 후꾸야마는 ‘역사의 종언’이라 하였다. 정말 그럴까?

그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의 국경 없는 글로벌한 세계체제가 위기에 이른 것이다. 오직 이는 ‘개인주의’라는 공과를 모두 안고 있는 것으로, 결과적으로 자연에 대한 착취와 파괴, 변형이라는 악순환의 위기를 함께 야기한 위기 중의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이런 문제에 대한 동아시아 문명, 즉 유교문명은 자신과 사회, 자연(自然)과 천도(天道)에 대해 깊은 성찰이 필요하고 인류의 미래를 개척해 나아가야 할 의무로서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럼 ‘천도(天道)’ 그리고 ‘자연(自然)’이란 무엇일까? 이것은 유교문명의 핵심 키워드이다. 천도란 공자시대에는 ‘의지가 있는 하늘’이었다. 즉 상제가 주제하는 하늘(主宰之天)이었다는 뜻이다. 기독교의 하느님과 큰 틀에서는 비슷하였다. 그 하늘이 맹자와 순자 대에 이르면 의리의 하늘(義理之天)이 된다.

여기서 ‘자연’이라함은 두 가지의 함의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일반론의 자연이다. 인공이나 인조에 대응되는 의미의 자연을 말하는데 흔히 인간도 자연의 일부이나, 만물의 영장이요 신령함을 지닌 존재로서 인간과 우주자연이라는 대립적 의미로의 자연이다. 다른 하나는 동양철학의 핵심어로서 ‘스스로 그러하다’는 의미의 우주질서로서의 자연이다. 이는 바로 ‘도’를 말하고 기독교의 피조물에 상대되는 의미의 ‘조물자’로서의 자연임을 뜻한다.

하늘, 즉 ‘천’이 인간의 품성에 들어와 철학적 인성에 의한 작용으로 변환되는 것이다. 이것이 천도이다. 우리가 늘 쓰는 말이 있다.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 “천벌을 받을 것이다”는 등. 이것이 ‘천도(天道)’이고 천명(天命)이다. “내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느냐?”, “남 앞에서 부끄럽지 않느냐?”를 하늘을 끌어와 말한 것이다. 이것이 ‘천인합일’이고 ‘천도’이다. 이것을 공자는 ‘지천명’이라 했고 신유학의 시대에 이르면 리(理)라 하고 심(心), 성(性)으로 전화한다.

『역』에는 『경』과 『전』으로 나뉘는데 『전』의 열 가지 편 중에서 『단전(彖傳)』은 64괘의 매 괘마다 있는데, 괘를 철학적으로 해석한 글이다. 이는 모두 의리의 하늘(義理之天)이라는 철학으로 『역』을 해석한 것이다. 이 『단전』이 지어진 때를 맹자와 순자 세대쯤으로 추론하고 있다. 그래서 『주역』에 의리역이라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어떤 철학자는 “인류의 사색과 성찰은 종교에서 철학으로, 다시 과학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마치 지금의 과학의 발전이 그런 과정에 있는 것처럼 과학, 진화생물학은 철학의 상위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이 모든 근원은 ‘우환(憂患)’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 우환의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가 종교요, 철학이다. 과학의 발전도 여기서 크게 다르지 않다.

인류가 근심하고 걱정할 일이 없다면 왜 종교가 필요하고, 철학이 어디에 필요할 것인가? 이런 성찰 속에서 동아시아문명이라 하면, 한국이던, 중국이던, 일본이던 유교 · 도교 · 불교를 모두 아우르는 문명사적 틀 속에 있다. 다만 유학이 입세적(入世的)이고 경세치용적이라는 이유로 인류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크게 작용한 것임을 전제로 유교문명이라 한 것이다.

유교문명은 자유가 아니라 평등이고, 합리가 아니라 동정이며, 법률이 아니라 예의와 양보이고, 개인주의가 아니라 인정(仁情)이다. 서구 계몽주의의 결과로 인한 심각한 개인주의와 자연 파괴, 착취와는 질적으로 다른 관점에서 이해될 수 있는 문명이고 인류 미래를 위한 방향을 제시할 수 있는 철학을 그 안에 담지하고 있다고 주장한다면 지나친 욕심일까? 지금의 자유민주주의가 아닌 다른 대안은 없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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