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번 버스로 따라가 본 그날의 발자취
5·18 자유공원
5·18 자유공원은 5·18 광주항쟁에 관한 자료를 보관하고 홍보하는 곳이다. 5.18 당시 군사재판 현장이던 상무대 법정과 영창의 원형을 복원, 재현했다.
자유공원은 5·18민주화운동 당시의 기록을 보관한 전시실, 연행자들이 고문과 조사를 받았던 헌병대 중대 내부반, 임시취조실로 사용한 헌병대 식당, 고문수사와 재판을 지휘한 계엄사합동수사본부 특별수사반이 임시본부로 사용한 헌병대 본부사무실 등이 있다.
5·18 기간이면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시민들이 군사재판을 받았던 법정과 영창에서 영창체험을 할 수 있다.
금남로 일대
옛 도청, 전일빌딩, 상무관 등 5·18의 상처가 가장 많이 남아 있는 금남로 일대는 5·18민주화 운동의 중심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시민군과 군인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격렬한 대치를 벌이던 옛 전남도청 건물, 진실을 알리기 위해 언론인들이 앞다퉈가며 치열한 취재 열기를 띄던 전일빌딩. 무고하게 죽은 시민들의 시신을 안치할 곳이 없어 급하게 시신을 비닐로 싸 안치했던 상무관 등 역사적인 순간을 담은 건물들은 지금도 같은 자리에서 그 날의 아픔을 상기시키고 있다.
전남대학교
1980년 5월 18일 계엄군은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등교를 하는 학생들을 막아 세웠다. 대학생들의 시위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에 학생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계엄군은 진압봉을 앞세워 학생들을 구타하고 연행하기 시작했다. 이를 만류하려던 시민까지도 폭행을 당했다.
등교하지 못한 학생들은 이런 계엄군의 폭력을 알리기 위해 전남도청으로 진출했다. 소식을 전해 듣게 된 사람들도 하나둘, 도청으로 몰려들었다. 전남대 앞에서의 첫 충돌을 신호탄삼아 5·18 민주화운동의 슬픈 역사는 시작됐다.
국립5.18민주묘지
1980년 5월 29일 망월동에서 일제히 진행된 1백 29구의 장례식, ‘폭도’라는 이름으로 진실이 왜곡되고 통제되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유족들의 슬픔마저 막을 수는 없었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희생된 주검은 청소차에 실려와 현재 구 묘역이라 불리고 있는 ‘망월동 묘지’에 묻혔다.
국립 5·18민주묘지는 97년 완공되어 2002년 5·18민주유공자법 제정에 따라 국립묘지가 되었다. 5만 여 평의 땅에 민주광장, 참배광장, 역사광장 등으로 조성 된 국립 5·18민주묘지엔 5·18민주화운동 기념일을 앞두고 많은 참배객이 찾아와 그날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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