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불열사 김영철, 그 파란했던 삶
들불열사 김영철, 그 파란했던 삶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6.02.15 15: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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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원 열사 영면 지켜...도청 회의실 2층 지키다 계엄군에 체포

【시민의소리=김다이 기자】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1남 2녀를 둔 30대 초반의 평범한 가장 김영철.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평범한 가장이였던 그의 일대기를 조명하고자 한다.

그는 윤상원 열사와 함께 전남도청 2층 회의실을 지키다 윤 열사의 영면을 바로 곁에서 지키며 계엄군에게 체포된 인물이다. 80년 갖은 고문으로 인해 얻은 정신 이상으로 오랜 병상생활 끝에 1998년 타계하기까지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여의치 않은 형편, 고아원에서 자라

김영철은 1948년 전남 순천에서 3남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는 갑자기 사라진 아버지 없이 모자가정에서 자랐다. 그의 어린 시절에는 6.25 한국전쟁으로 인해 전국에는 난민구호소와 같은 고아원과 모자원이 있었다.

1953년 여섯 살이었던 그는 어머니와 형, 동생과 함께 목포 모자원에서 살아가게 됐다. 1955년 목포중앙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광주의 인성모자원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구시청과 사직공원 사이에 있었던 인성모자원은 학동으로 이전하면서 영신원으로 개명됐다. 그렇게 김영철 열사는 어머니와 함께 영신원에서 살면서 광주서석초등학교를 다니며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는 광주서중학교를 입학하고, 광주제일고등학교를 다녔지만, 어려웠던 집안형편으로 대학 진학의 꿈은 꿀 수 없었다.

광주제일고등학교를 다녔던 동창생들처럼 정치가, 학자, 의사가 되기 위해 명문대학교에 진학하고 싶은 생각은 있었지만, 경제적인 환경이 뒤따라주질 않았다.

대학진학으로 남들처럼 살고 싶었지만, 남들처럼 살 수 없었던 계기가 된 것이 이때부터라고 할 수도 있다.

짧은 공직생활과 들불야학 맏형으로서 활동

결국 대학진학의 꿈을 포기한 김영철은 5급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기로 마음먹는다. 고등학교 3학년때부터 공무원 시험공부를 준비하면서도 주말에는 돈을 벌기 위해 건축현장 등에서 노동을 해야만 했다.

그렇게 1968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그는 승주군 별량면사무소로 발령 나면서 공무원생활을 시작하게 된다. 1년 3개월가량 근무했지만, 각종 비리행위에 환멸을 느꼈던 그는 퇴직신청을 하고, 군대에 입대하기로 결심한다.

▲78년 10월, 다정한 김영철 김순자 부부 ⓒ김영철 열사 유고모음- 못 다 이룬 공동체의 꿈

제대 이후에는 신문 배달원을 하며 서울에서 세상을 배우게 된다. 그는 군대에서 첫 휴가를 나와 알게 된 김순자와 7년 동안 의남매로 지내고 있었다. 그렇게 의남매 인연을 맺어 오누이처럼 사겨왔던 김순자와 1976년 결혼을 하게 된다.

결혼이후에는 서울 생활을 정리하고, 아내와 함께 다시 승주군 별량면으로 돌아와 신혼살림을 시작했다. 그곳에서 그는 소외받는 사람과 함께 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전남협동개발단에서 활동했다. 이후 김영철은 아내와 아들 김동명을 데리고 광주로 돌아오게 된다.

30세의 나이에 영신원으로 돌아왔던 그는 어린 시절 ‘이모’라고 부르며 각별한 사이었던 영신원 서경자 원장의 도움을 많이 받게 된다. 서경자 원장이 마련해준 전세금 10만원으로 그는 광천동 시민아파트로 이사할 수 있었다.

1978년 들불야학이 창립되면서 그는 강학들과 친해지기 시작했고 형제처럼 가깝게 지냈다. 야학 수업이 끝나면 윤상원, 박효선, 박관현, 박용준, 임낙평 등은 10평 남짓한 김영철 집으로 찾아와 사랑방처럼 막걸리 잔치를 벌이기도 했다.

김영철은 1980년 광천신용협동조합의 이사장이 되면서 더욱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비상계엄확대와 공수부대의 광주 투입으로 인해 그에게 80년 5월은 혹독했다.

도청 사수, 윤상원 열사 영면 지키기도

들불야학 강학들과 학생들은 계엄군의 만행을 알리는 투사회보를 제작해 시내에 배포하기 시작했다.

5월 18일을 시작으로 계엄군의 만행은 광주를 암흑의 바다로 만들었다. 시민 학생수습위원회가 구성됐고, 도청 앞으로 모인 사람들은 궐기대회로 군사정권의 부정을 알리며 민주주의를 외쳤다.

그는 항쟁동안에도 몇 번이나 귀가해 버릴까 생각하기도 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생각할 법할 일이다. 그러나 김영철 열사는 함께 해왔던 동료들의 의젓함을 보고 도청에 남아있기로 결심했다. 27일 새벽, 그는 윤상원 열사와 함께 도청 2층 회의실을 지키며 계엄군과 대치하고 있었다.

그러나 회의실 창문을 뚫고 들어온 M16 소총은 함께 해왔던 윤상원 열사의 배를 관통하는 참사를 불러일으켰다. 바로 옆에는 김영철이 함께하고 있었다. 윤상원 열사는 그에게 “형님, 틀린 것 같소”라는 말을 하고 쓰러졌다.

그리고 사과탄이라 불렸던 수류탄 몇 개가 들어와서 터지더니 앞의 커튼에 불이 붙었다. 커튼의 불길은 윤상원을 덮쳤고, 총상에 화상까지 입게 됐다. 김영철 열사는 이 모든 걸 생생하게 목격했다.

윤상원 열사와 함께 도청 2층 회의실 경계를 섰던 김영철과 함께 있었던 이양현은 계엄군에게 체포되어 항복하게 됐다.

계엄군에게 잡혀 도청 문 앞으로 나가는 순간 외신기자가 카메라로 찍고 있었다. 김영철 열사의 자서전에는 “계엄군들의 인도하에 도청 문으로 가니 노란머리 외신기자가 티비 카메라로 우리를 촬영하고 있었다”며 “피 흘리는 나의 얼굴을 찍으라고 얼굴을 들이 내미니 한 계엄군이 나의 뒷목을 M16개머리로 후려쳤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그렇게 김영철 열사는 시민군과 함께 상무대 영창으로 끌려갔다. 상무대에서도 간첩으로 몰려 개미고문, 물고문, 큰 주전자의 찬물을 억지로 마시게 하는 등 갖은 고문을 겪게 됐다.

갖은 고문으로 정신이상 증세 악화

▲97~98년, 합병증과 신체마비 증상으로 제대로 걷지 못하고 건강이 급격히 악화된 김영철 열사 ⓒ김영철 열사 유고모음- 못 다 이룬 공동체의 꿈
그는 결국 자살을 마음먹기로 했다. 콘크리트 벽 모서리에 이마를 힘 있는 대로 찍었다. 자살시도를 한 소리를 들은 헌병들은 우르르 몰려와 군화발로 온 몸을 짓밟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

무자비한 고문과 몽둥이질은 계속 됐다. 그는 군법회의 1심에서 12년 선고를 받고, 2심에서 7년형을 선고받게 됐다. 최후의 진술에서 김영철 열사의 굳건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최후진술에서 “자랑스러운 민주시민 광주시민 만세”를 외치기도 했다. 대법원 판결에서는 3년으로 감형이 되었지만 김영철 열사의 뇌신경 손상은 멈추지 않고 계속됐다.

1983년 12월 25일 성탄절 특사로 형 집행정지로 인해 출감하게 된 그는 지독했던 고문으로 정신이상 증세가 심해지면서 정신과 병동에 입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아내 김순자는 남편의 정신이상 증세를 보살피며 고통을 함께 나눴지만 병은 낫지 않았다. 결국 1984년 국립나주정신병원에 입원해 매일 일기장에 아내의 면회, 지인들의 면회를 써가며 생활했다.

그렇게 16여 년간 치료 도중 생긴 여러 합병증과 신체마비 등으로 그는 1998년 8월 16일 51세 나이로 가족 곁에서 영면했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공동체를 늘 꿈꾸었고, 80년 5월 마지막까지 도청을 사수하며 민주주의를 지키고자 했던 김영철 열사가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해 비록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지만 우리 모두의 가슴 속에서 만큼은 영원히 살아있기를 기원해 본다.

▲김영철 열사의 아내 김순자씨는 그가 생전에 기록한 5.18과 관련한 일기, 메모 등을 5.18기념재단에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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