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오전 이홍주 인문학 강사는 남구청을 출발하여 대촌동 원산마을 필문 이선재 창학문 사당을 방문 참배하고 이문효 종가 어른으로부터 필문 이선재에 대한 보충설명과 부조 묘를 찾아 참배하였다.
이홍주 강사는 “세종 12년 광주사람 노홍준이 광주 목사 신보안을 구타한 사건이 발생하여 당시 광주목은 무진군으로 강등되어 있었다. 필문은 문종 원년(1451년) 광주의 원로들과 함께 상소하여 무진군이던 광주를 다시 광주목으로 복귀시킨 위대한 인물이기도 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필문의 5대손인 이발(李潑:1544~1589)과 이길(1547~1589) 형제가 정여립 모반사건이라는 기축옥사에 관련되면서 필문 이선재 가문은 불행하게 멸문의 화를 당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이 강사는 “괘고정수에 대한 이야기에서 앞서 모든 생명체는 관심과 애정을 표하면 서로 소통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괘고정수는 600년 된 나무로 필문 이선재가 직접 심었으며 애지중지하였다. 필문 가문에서는 과거에 급제하면 버드나무에 북을 달고 축하잔치를 했기 때문에 ‘괘고정’이란 이름을 붙었다. 또, 필문은 이 나무가 죽으면 가문이 쇠락할 것이라고 예언했는데 필문 5대손인 이발 형제가 정여립 모반사건으로 가문이 멸문되자 이 버드나무는 죽어 예언이 입증되었다.”고 말했다.
이어서 “큰 나무가 동네 앞에서 죽어 있어서 흉물이 되자, 가문의 종손이 일꾼들에게 베려고 했으나 벨 수 없었고 태우려고 했으나 타지도 안 해서 옆에다 느티나무를 심었다. 그 후 이발 형제가 정여립 모반사건과 무관하다는 판결이 나자 나무는 살아났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는 나무다.”라고 말했다.
이문효 종손은 “우리 가문은 필문 할아버지의 묘를 도굴꾼들이 도굴한 것도 몰라서 숭조 사상에 잘못해서 송구스럽다고 말하고 역사는 기록이 있어야 한다. 필문 할아버지의 사망연대 기술이 다르다는 것은 1453년으로 기술된 것이 맞다. 할아버지는 서울에서 살다가 돌아가셨는데 1544년에 광주로 이장했다. 그리고 도굴꾼들이 묘기를 일본으로 불법반출을 해서 일본에서 찾아오려고 문중에서 일본을 갔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처음 적발 당시 공항에서 압수해야 하는데 문화재관리법이 너무 허술하여 일본으로 넘어가버린 것이다.”고 말했다.
시민활동가 김선생은 “오늘 새로운 것은 나도 일기를 꼭 서야겠다. 종이에 써서 보관하는 습관이 좋은데 종이에 기록하면 분량이 많고 컴에 기록하면 기록을 변조할까 걱정된다. 그러나 컴을 통해서 일기를 꼭 써야겠다고 말했다.
또 필문을 만나면서 우리나라의 문화재관리가 영토관리처럼 너무 허술하다는 안타까움을 지울 수 없으며 역사는 승자와 후세에 의한 기록으로 너무나 왜곡되거나 삭제된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러므로 자기의 기록관리를 잘 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으며, 괘고정수에서 보듯이 마을에 노거수 당산나무는 하늘과 마을 사람사이에 안테나 역할이나 교량 역할을 하는 것으로 전통신앙을 무시할 수 없음을 입증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