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의병정신의 뿌리를 찾아서8. 전남에서 제일가는 의병장 ‘심남일’
호남 의병정신의 뿌리를 찾아서8. 전남에서 제일가는 의병장 ‘심남일’
  • 김다이, 송선옥 기자
  • 승인 2015.10.29 1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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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마을 훈장, 의병장이 되다

“초야의 서생이 갑옷을 입고
바람타고 남도(南渡)할새 말이 나는 듯
왜놈들을 모조리 소탕치 못하면
맹세코, 백사장에 죽어도 돌아오지 않으리“
-1907년 심남일 作

의향이라고 불리는 광주·전남은 한말에 일본군에 맞서 여러 의병장들이 활약상을 펼쳤다. 그중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이름이 있다. 바로 전남에서 제일 가는 심남일(沈南一, 1871~1910) 의병장이다.

특이한 점은 심남일 의병장의 순절비는 광주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지닌 광주공원에 세워져 있다. 꽤나 쌀쌀해진 날씨 탓에 대낮에 광주공원을 찾았지만 옷깃을 여미게 했다.

광주 근현대사의 살아있는 현장, 광주공원

광주공원은 광주의 근현대사의 살아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광주공원에는 심남일 의병장의 순절비뿐만 아니라 5.18사적비, 4.19의거 영령 추모비, 현충탑, 박용철·김영랑 시비 등이 자리해 광주의 역사적인 의미가 깃든 곳이다.

일제 강점기 때는 일본인들의 신사가 자리했던 곳이라고 알려졌다. 현재 광주공원은 오랫동안 사용하고 있지 않은 시민회관의 리모델링 공사와 현충탑 주변 공사로 어수선했다. 마실 나온 은빛 머리를 한 노인들이 앉아 쉬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심남일 의병장 순절비는 광주공원노인복지관 바로 앞에 세워져있다. 사실 복지관 앞으로 지나다닌 적은 많았지만 심남일의 순절비가 이곳에 세워져 있다는 것을 취재과정에서 알게 됐다.

최근 사직동 역사문화공원을 만들겠다는 조성 사업이 시작되면서 광주공원 내 친일파의 선정비도 나란히 세워져 있어 논란이 되기도 했던 곳이다.

여전히 일제감점기 때 남긴 흔적과 친일 잔재가 있는 곳이 광주공원이기도 하다. 먼저 반민족 행위자인 윤웅렬과 이근호의 선정비를 정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져가고 있다.

호남창의회맹소 가담으로 의병활동 전개

한말 일본군을 무찌르기 위해 활약한 심남일 의병장의 순절비가 있는 곳에 친일파의 선정비와 같은 장소에 있다는 사실이 대조되는 대목이다.

심남일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남일파’로 불릴 정도로 기세를 떨치기도 했다. 심남일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아보자. 그는 전남 함평의 작은 서당에서 훈장을 하고 있던 평범한 사람이었다.

원래 심남일의 본명은 심수택(沈守澤)이다. 그는 1871년 전남 함평군 월야면 정산리 새터에서 태어났다. 호는 덕홍(德弘), 본관은 청송이다.

세상 사람들에게 ‘심남일’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그는 어떤 시절을 보냈을까. 그는 관직을 지낸 적은 없었지만 학식이 있어 고향마을에서 서당 훈장으로 지내며 부인과 2남 3녀를 거느린 평범한 가장으로 살고 있었다. 평범한 시골 훈장이었지만 평서 정의감이 강했다고 전한다.

1905년 을사늑약이 이루어지면서 일제의 침략 공세가 공공연하게 드러나 광주는 물론 전국적으로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당시 심남일 선생은 스스로 의병을 일으킬만한 처지가 되지 않았다. 명망 높은 유학자이거나 재력이 뒷받침할만한 부호도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심남일 선생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훈장으로 비분강개할 일본의 만행을 가만히 지켜볼 수만 없었다. 그는 기삼연(奇參衍)의 주도로 이끈 호남창의회맹소를 알게 되고, 가담하게 됐다.

남한대토벌작전으로 체포되다

그러나 1908년 기삼연 의병장이 총살을 당하자 심남일은 다시 독자적인 의병부대를 결성해 항일의지를 굳건히 다졌다.

기삼연 의병장이 일본군에게 총살을 당해 순국한 곳은 광주 서촌교(西川橋) 밑 백사장이라고 알려졌다. 아마도 광주공원 앞 천변 일대일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심남일 의병장을 중심으로 ‘남일파’는 강진 오치동 전투를 시작으로 능주, 함평, 남평, 보성, 장흥 등 수십차례에 거쳐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입혔다고 한다.

남일파의 의병활동은 우선 친일 세력 제거활동을 펼쳤다. 또한 의병을 빙자한 도적을 퇴치하고, 반일 투쟁활동을 전개해나갔다.

심남일 의병장은 1908~1909년 전라남도의 중남부 지역에서 가장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성장하게 된다. ‘남일파’ 의병부대는 연합전선에 유리한 위치에 있었고, 일제는 심남일을 체포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이후 1909년 일본은 호남의병을 완전히 진압하기 위해 ‘남한대토벌작전’이라는 명칭으로 호남지역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통해 조여 왔다. 결국 심남일 의병장은 1909년 10월 9일 체포되면서 광주감옥에 갇혀 모진 고문과 심문을 받는다.

호남 의병전시기념관 건립 필요성 대두

며칠 후 그는 대구감옥으로 이송되고, 체포된 지 1년 만에 1910년 10월 4일 그의 나이 39세에 순국하게 된다. 이후 심남일 의병장은 정부에서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최근 광주지방보훈청이 10월의 우리 고장 현충시설로 ‘의병장 심남일 순절비’를 선정하기도 했다.

심남일은 체포된 이후 일본군에게 “제 나라를 위한 것도 죄가 될진대 남의 나라를 빼앗는 것은 무슨 죄에 해당하느냐”라며 “대장부가 비록 너희에게 사로 잡혔지만 쥐 같은 네놈들과는 옳다 그르다 따지고 싶지 않다”고 당당하게 외쳤다고 한다.

이렇듯 호남지역에서 활동한 의병장들의 활약상이 재조명되고 있는 가운데 광주·전남을 중심으로 한 의병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의병전시관 설립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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