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태의 몽환적 한계
조정태의 몽환적 한계
  • 정인서
  • 승인 2015.08.05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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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시립미술관 금남로분관 전시장에서
▲ 몽환-한 여름밤의 꿈, 193.9*20.0, 2015.

그림을 그리는 '작가'라는 부류는 일반인과 다른 계층에 사는 사람들이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작가가 생각하는 상상의 세상을 현실의 세계에 대입시키는 표현활동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작가는 상상의 영역을 어떻게든 실재의 세상과 연결시켜주는 통로 역할을 하는가 하면 그가 해석하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을 또는 생각을 재현하는 일을 한다. 그렇다면 일반 사람은 그 작가의 상상이 우리 삶을 재현하는 것이므로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어야 하고 해석이 가능해야 한다. 그런데 조정태는 어렵다는 느낌이 먼저 들었다.

조정태 작가의 6번째 개인전이 광주시립미술관 금남로분관에서 7월 30일부터 8월 12일까지 열리고 있다. 무더위를 피해 모두가 집과 직장을 떠나는 휴가철에 열린 그의 전시는 일부러 작품도 '휴가'를 보내려는 의도인지도 모르겠다. 이 무더위에 누가 전시장을 찾은단 말인가?

전시장 입구에는 '나는 무엇을 그리고 있는가?'라는 화두를 던진 조정태 개인전 현수막이 우두커니 서있었다. 온통 인산인해를 이룬 피서객이 모두들 고무튜브를 하나씩 두른 채 있는 모습들이 빨간색 바탕으로 배경을 이루었다.

사실 이 광경은 무심코 지나쳤다. 으레 앞에 걸려있는 것 쯤으로 생각하고 전시장 문을 여는 순간 먼저 핏빛으로 온 산하가 물든 <신 천하도>가 자리했다. 그리고 옆에는 마치 피에 굶주려 있는 인간군상을 이룬 <몽환-한 여름밤의 꿈>이 연이어 있었다.

이곳은 우리 세상이 아니라 단테의 <신곡>에 등장하는 지옥편의 이미지가 중첩되어 떠올랐다. 그런가 하면 불의 지옥 이야기처럼 "거기는 불도 꺼지지 아니 하느니라"는 생각이 가슴을 짓누르는 듯 했다. 아! 죄를 짓지 말아야겠다.

지옥의 존재 여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중세 가톨릭에서 영원지옥설을 이야기했던 것처럼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은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있다. 신약성경에서도 예수가 말한 '게헨나(Gehenna)'는 지옥의 뜻으로 사용되는 데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마가복음 9:48)'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러한 불천지가 되어 모두 빨갛게 타고 있는 <신 천하도>의 모습은 지난달 29일부터 일주일 넘게 불길이 번지고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목격할 수 있다. TV뉴스를 통해 화면 가득한 빨간 불길은 사람을 두렵게 만든다.

이와 마찬가지로 조정태의 그림은 두렵다. 무섭다. <신 천하도>는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광경에서 ‘불에 타건 말건’이라는 방관자로 느껴졌다. 슬쩍 옆으로 가보니 <일상적 풍경-응시>도 방관자의 입장에서 들여다보는 인간군상을 나타냈다. 역시 온통 빨간색이었고 4개의 튜브만 색을 칠했다. 이 작품의 일부 빨간색 부분만 현수막에 차용됐다.

빨간색은 피를 상징하거나 불에 타는 모습을 상징한다. <일상적 풍경-인간세계>라든가 <몽환 -사육> 등의 작품 역시 우리의 세계가 불의 지옥임을 상징화시켜주고 있다. 이들 작품 모두가 지난 해와 올해 그려진 것들이라는 점에 주목해본다.

전시장 한쪽 구석진 곳에 두 개의 작품이 이어져 있는 <군상 ⅠⅡ>는 위에서 내려다 본 튜브를 갖고 물에 둥둥 떠있는 듯한 모습이다. 즐거워야 할 여름휴가 모습이어야 하지만 역설적으로 고통의 휴가를 보내는 인간이었다. 아마 요즘 휴가를 떠난 사람들은 이 모습이리라.

▲ 군상 ⅠⅡ, 2015.

그런데 이 작품에서 떠오르는 것은 '세월호'였다. 아비규환의 모습을 상상한 작가는 이러한 방식으로 그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것으로 스스로 자위 만족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세월호' 이후 겪은 생채기로 1년 정도 작품활동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고백을 들으니 이 세상에 대한 그만의 저항방식을 읽을 수 있었다.

반면 전시장의 왼쪽 뒷공간에 자리하고 있는 <천하도>, <천지-맥>, <천지-운무>, <천지-조화> 등의 작품은 ‘세월호’ 이전에 그려진 작품이라는 점에서 그의 평소 성향을 읽을 수 있었다.

결국 지난 1년 사이에 드러난 그의 작품 변화는 작가로서 겪는 고통을 도저히 맨정신으로 붓을 들 수 없는 몽환의 힘을 빌린 것에 다름 아니다. 세상이 덧없고 허황하다는 패배의식에 빠진 것은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그의 한계를 드러내는 일탈이라 할 것이다.

'나는 무엇을 그리고 있는가'라는 자기질문에 갇힌 작가로 남지 말아야 한다. 그러지 않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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