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여왕에게 손목이 잡혀 뛰고 또 뛰는 엘리스보다 고달픈 한 해였습니다. 동화 속 '이상한 나라'에선 죽어라 뛰면, 제자리는 유지할 수 있다더군요. 우린 거꾸로 가는 나라의 국민으로 살다 보니, 정방향의 역설도 모자라 유신의 1970년대로 후진하는 세상까지 경험하나 봅니다. '퇴행의 정치'가 2014년의 눈부신 하드웨어를 무색케 하는 세(歲)밑입니다.
2013년 이맘때, 박근혜 정부는 철도노조 강경 진압과 통합진보당 사건 등 살풍경으로 임기 첫해를 마감하고 있었습니다. 대학가에서 시작된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는 안녕하지 못한 모든 이들의 마음과 공명했었죠. 비정규직의 이야기를 담은 드라마 <미생>이 울림을 얻는 가운데 '종북몰이' 광풍이 몰아치는 박근혜 정부 2년 차 연말이 지난해와 어떻게 다른지 모르겠습니다. 올해의 정치 분야 5대 뉴스를 꼽아보니, 우린 틀림없이 거꾸로 가는 나라에 살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 세월호 참사
절대로 출항해선 안 될 배가 진도 앞바다 거친 물살에 침몰했습니다. 295명이 사망했고 9명이 실종됐습니다. 구조된 사람은 '0'. 희생자 대부분은 수학여행 가던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었습니다. "이게 나라냐!"고 했습니다. 국가는 70명을 구조했던 1993년 서해 훼리호 사건 때보다 무능했습니다. 허둥대다 72시간의 '골든타임'을 허비했습니다. 무능하기만 한 게 아니라, 책임도 회피했습니다. 비정규직 선장과 반(半) 백골로 발견된 유병언 씨 일가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대통령은 유체이탈 화법으로 정부의 실패를 외면했습니다.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흘렸던 박근혜 대통령의 눈물이 진심이었는지, 악어는 알까 모르겠습니다. 6.4 지방선거가 끝나기 무섭게, 박 대통령은 세월호 유족의 면담 요구조차 싸늘하게 외면했습니다. 박 대통령이 유족들에게 철석같이 약속했던 세월호 특별법이 기약 없이 표류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당 의원들이 세월호 참사를 '교통사고'에 비유하는가 하면, 일부 보수단체 인사들은 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단식 중인 유가족들 앞에서 '폭식 퍼포먼스'를 벌이기도 했죠.
정권과 언론이 조장한 세월호 피로감에 난데없이 이념 논란으로 치환된 세월호 특별법은 숱한 부침을 겪다, 참사가 발생한 지 206일 만인 11월 7일에서야 국회에서 처리됐습니다. 그 사이 진상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해달라는 유족들의 요구는 물거품이 됐습니다. 아직도 진상조사위 구성 등에서 마찰음이 들립니다. 새누리당은 공안검사 출신 인사들을 밀어 넣으려 합니다. 내년에 활동에 들어갈 진상조사위가 중도 파행으로 끝난 국회 국정조사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는 우려가 벌써부터 나오는 까닭입니다. 해를 넘기며 '잊지 않겠습니다'라는 다짐을 다시 한 번 되새겨봅니다.
■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 사건
시간을 1900년 전 중국의 후한(後漢)말로 되돌린 듯 한 사건이 권력 내부에서 발생했습니다. 11월 28일 <세계일보>의 보도로 이른바 '십상시'로 명명된 환관 정치의 내막이 세상에 추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오랜 측근이자 '비선 실세'로 통하는 정윤회 씨가 청와대 십상시들과 인사 개입 등 국정을 농단했다는 내용의 청와대 공식 문건이 알려지자 정권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사건은 정윤회 씨와 박 대통령의 동생인 박지만 EG회장 사이의 권력 암투설로 발전되기까지 했습니다. 여기에 승마 선수인 정 씨의 딸에 대한 특혜설을 뒷받침하는 정황과 함께 박 대통령이 문화체육관광부 국·과장에 대한 인사를 직접 지시했다는 점이 밝혀지기도 했습니다.
'궁중 야사'와 같은 정치 막장극으로 정 씨와 박 회장, 이재만 청와대 총무비서관 등이 줄줄이 검찰 포토라인에 섰습니다. 불과 집권 2년 만에 발생한 권력의 심각한 균열 징후에, 콘크리트 같던 박 대통령의 지지율은 지지층에서조차 뚝뚝 떨어져 집권 후 최저 수준인 30퍼센트(%)대까지 추락하기에 이릅니다. 그 어느 정권보다 심한 박 대통령의 불통이 국민들의 불신을 불러, 레임덕이 거론되기도 했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은 격하게 반응했습니다. 청와대 공식 문건을 "찌라시"라고 자기 부정하며, 사건을 수사하는 검찰을 향해 세 차례나 가이드라인을 쳤습니다. 검찰은 권력 암투의 실체, 문건 내용의 진위보다 문서 유출 경위에 대한 수사에만 치중했습니다. 수사 과정에서 최 모 경위가 청와대 민정수석비서관실의 회유가 있었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하는 일도 벌어졌죠. 결국 검찰 수사는 일개 경찰관 한 명의 거짓말에 청와대가 놀아났다는 어설픈 결론을 향해 치닫습니다. 그러나 검찰 수사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여론이 63%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나 파문이 쉽게 가라앉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박 대통령은 쏟아지는 쇄신 요구를 또 얼렁뚱땅 넘어가려 합니다. 이러다보니 2015년 '쌍끌이 특검'(세월호 특검, 정윤회 특검)을 예상하는 말이 일각에서 나오는 거겠죠.
■ 통합진보당 강제 해산
'종북 마녀사냥'은 전가의 보도인가 봅니다. 2013년 정부가 느닷없이 헌법재판소에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청구를 할 때, 많은 사람들이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 의혹 국면을 전환하려는 의도로 봤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무리한 송사가 1년 동안 진행되더니, 끝내 정당 해산이라는 초유의 결과를 빚었습니다. 공교롭게 헌재가 통진당 해산을 결정한 12월 19일은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이 정점으로 치닫던 때였습니다. 박 대통령이 일부 인사들의 토크 콘서트를 '종북'이라고 규정하며 예고편을 띄운 뒤였습니다.
헌재의 결정은 심각한 파문을 낳고 있습니다. 1987년 '헌법 수호자'로서의 지위를 갖고 탄생한 헌재가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고 헌법을 파괴하는 결정을 내렸다는 비판에 직면한 것만으로도 '역사의 퇴보'로 기록될 만합니다. 혹자는 이번 헌재의 결정을 보며 국회 해산과 정당 및 정치활동을 중지시킨 1972년 박정희 정권 시절을 떠올렸다고 하더군요. 이는 다시 "자유 민주주의를 확고하게 지켜낸 역사적 결정"이라며 헌재 결정을 환영한 박근혜 대통령의 모습과 겹칩니다.
'법의 언어'라고 볼 수 없는 논리적 비약과 적의에 찬 문장들로 결정문을 채운 헌재의 보수성도 도마에 올랐습니다. 9명 중 단 한 명을 제외한 무려 8명의 재판관이 그저 '관심법'으로 통진당을 북한의 지령을 받는 정당으로 규정하고, 소속 의원들의 의원직마저 박탈했으니 논란이 당연합니다. 게다가 헌재의 결정 이후 보수단체는 10만여 명에 달하는 통진당 당원 전체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고발했고, 검찰은 기다렸다는 듯 수사에 착수했습니다. 가히 '공안 광풍'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습니다. 가장 저급한 통치술의 단면입니다.
■ 인사 파동
박근혜 정부의 온갖 불통 논란은 예외 없이 '인사(人事) 파동'으로 이어졌습니다. 안대희, 문창극 두 국무총리 후보자의 잇따른 낙마 사태가 대표적입니다.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한 국무총리의 후임자 하나 찾지 못해 짐을 쌌던 정홍원 총리가 '부활(?)'하는 일까지 벌어졌죠. 안대희 전 후보자는 5개월 동안 무려 16억 원의 수입을 거둔 고액 전관예우 논란으로 제풀에 고꾸라졌습니다. 게다가 총리가 되면 변호사로서 벌어들인 11억 원을 기부하겠다고 한 것으로 알려져 돈으로 총리자리를 거래하느냐는 비판까지 받아야 했습니다.
문창극 전 후보자의 낙마는 현 정부 최악의 인사 참극으로 기록될 만합니다. 총리 발탁 하루 만에 일본의 한국 식민 지배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민족 비하성 과거 발언이 공개돼 거센 저항을 야기했습니다. 그럼에도 문 후보자는 자신의 억울함을 항변하며 국회 인사청문회에 나서겠다는 고집을 부려 불난 데 기름을 붓기도 했죠. 초유의 총리 후보자 연쇄 낙마에 김명수 교육부장관 후보자의 제자 논문 표절 의혹까지 드러나 박근혜 정부의 인사정책은 최악의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결국 정 총리의 유임으로 세월호 참사에 대한 정부의 책임은 그 누구도 지지 않은 꼴이 됐습니다.
유진룡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은 세월호 참사 직후 국무회의 자리에서 "내각 총사퇴"를 주장해 미운털이 박혔다고 합니다. 이임식도 없이 쫓겨나다시피 물러난 유 전 장관의 후임으로 청와대는 정성근 후보자를 발탁했으나, 음주운전 및 사생활 논란으로 청문회 문턱을 넘지 못했습니다. 정윤회 비선개입 의혹 정국에서 유 전 장관은 박 대통령의 지시로 문체부 국·과장을 인사 조치했다고 폭로해 박 대통령을 다시 한 번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차갑게 내친 유 전 장관과 달리, 박 대통령은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과 소위 '문고리 권력 3인방'으로 불리는 청와대 비서관들은 여전히 감싸고돕니다. 2015년 초 개각설이 나오고 있지만, 김 실장과 문고리 3인방이 교체될지는 두고 볼 일입니다.
■ 야당의 실패
불통 논란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정부의 무한 독주를 허락한 야당의 무능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 3월 안철수 세력과 민주당이 합당한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호랑이를 잡겠다며 호랑이굴에 들어간 안철수 의원은 기초선거구 무공천을 주장하다 명분도 실리도 잃고 '호랑이밥' 신세가 됐습니다. 질 수 없는 선거라던 지방선거에서 패한 데 이어, 7.30 재보선에서도 공천 파동으로 패배를 자초해 김한길-안철수 공동대표 체제는 4개월 단명으로 끝났습니다. 선거를 앞두고 기계적으로 결합한 야권의 불완전 재편은 이처럼 '새정치민주연합'이라는 합당의 흔적만 당명에 덩그러니 남기고 익숙한 야당의 모습으로 빠르게 회귀했습니다.
세월호 국정조사에서 야성을 보이지 못한 새정치연합은 안철수-김한길 대표 체제 이후 바통을 이어받은 박영선 비상대책위원장 체제에서도 맥을 못 췄습니다. 세월호 특별법 협상 와중에 원내대표를 겸하던 박 위원장이 돌연 탈당 운운하며 사흘간 잠적해버리는 무책임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세월호 특별법이 누더기가 되어간 과정에는 이 같은 야당의 전략 부재와 내부 갈등이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문희상 비상대책위원장 체제가 뒤를 이었지만, 비상하지 않은 비대위 체제의 일상화는 새정치연합의 무기력한 현재를 보여주는 단면이 아닐까 싶습니다.
2015년 2월로 예정된 새정치연합의 당권 경쟁이 시작됐습니다. 도전장을 낸 이들은 저마다 혁신을 외치는가 하면, 집권의 토대를 닦는 데에 정치 생명을 걸겠다고 결기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수언론을 통해 야당에 대한 악의적인 프레임이 가동된다는 점을 감안해도 아직까지는 친노와 비노 세력 간의 이전투구의 양상만 도드라져 보입니다. 야당의 실패는 야당만의 실패로 그치지 않는다는 게 비극입니다. 야당이 달라지지 않으면 박근혜 정부의 임기 3년 차도 올해보다 나아지지 않을 겁니다. 야당의 재정비로부터 정치가 제 기능을 하는 2015년을 기대해보겠습니다.
/시민의소리=프레시안 교류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