닳아지는 말들
닳아지는 말들
  • 문틈/시인,시민기자
  • 승인 2014.07.30 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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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날마다 쓰는 말도 태어났다가 죽는다. 생명체나 매 한가지다. 대중이 함부로 사용하다가 버린 말들에게도 운명이란 것이 있는 셈이다. 요즘처럼 대중매체가 발달한 시절에는 그 생멸의 정도가 빠르고 심하다.
우리가 어릴 적 썼던 말들 중에는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말들이 참 많다. 몇 개 단어를 떠올려 보면 고무신, 우장, 동무, 호야, 갓, 버선, 신작로 같은 말들은 거의 사라지다시피 되었다. 태양, 별, 구름, 무지개, 안개, 새처럼 사람과 멀리 떨어져 있는 말들은 오래 변하지 않거나 천천히 사라지고 사람과 가까이 있는 앞서 지적한 말들은 빨리 변하거나 사라진다고 한다.

말이 사라지는 이유는 갖가지다. 가령 동무라는 말은 북한에서 사용한다 하여 우리는 사용하지 않는다. 인민이라는 말도 그렇다. 말하자면 말이 정치적 이념적 이유로 사용할 수 없게 된 경우다. 그런가 하면 우리가 오랜 동안 써온 우뢰라는 말은 사라져버린 이유가 좀 특이하다. 특정 지역 사람들이 발음하기 어렵다 하여 표준어에서 일부러 삭제하고 우레라는 말로 바꾸어버린 경우다.
‘나의 조국’ 이라 쓰고 ‘나에 조국’이라 읽어도, ‘의자’라 쓰고 ‘이자’라 읽어도 표준어로 규정한 것도 그런 이중모음을 특정 지역 사람들이 잘 발음하지 못한다는 이유에서였다. 표준어 규정을 그런 식으로 바꾼 것이 좋은 것인지는 판단이 잘 안선다.
우레라는 말만 놓고 본다면 발음할 때 입 안에서 한 바탕 작은 천둥을 치듯 혀가 입안을 휘젓고 나오는 소리여서 그야말로 우뢰라는 뜻에 흡사한 발음이 되는데 그냥 우레라고 바꾸고 나서부터는 도무지 뜻과 표현이 동떨어진 느낌이다. 우뢰라는 말은 엉뚱한 이유로 강제로 숙청당한 셈이다.

우리나라 말은 정말이지 너무 빨리 변하는 것 같다. 200년이 넘은 한글 기록물을 지금 사람들더러 읽으라 하면 아마 무척 어려워 할 것이다. 거의 고대어 수준이나 다름없어서 전문연구가의 도움이 필요할 정도다. 빠르게 변하는 우리말은 당대 사람들 간의 소통에는 별 문제가 없을지 모르지만 옛 사람과 뒷 세대 사람 간의 소통에는 적잖은 장애가 생긴다.
250년 전 미국 건국의 공신 벤자민 프랭클린이 쓴 자서전은 영어를 아는 사람이라면 오늘 외국인이 읽어내기에도 어렵지 않다. 지난 100년 어간에 성서의 번역본이 여러 차례 나온 것이 우리 말의 빠른 변화를 잘 말해준다. 성서에 쓰였던 ‘가라사대’가 무슨 말인지를 모르는 요새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요즘은 어떤가. 당대에 쓰는 말들도 자고 나면 사라져버린 경우가 많다. 불닭이라는 말이 대유행이었던 것을 떠올려보면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말이 사라져 버리는 데는 갖가지 이유가 있다고 했는데 그 가운데는 너무 함부로 지나치게 사용해서 사라져버렸거나 혹은 의미가 퇴색한 말들도 참 많다. 웰빙, 힐링 같은 외래어는 너무 함부로 사용해서 그 의미가 퇴색해버린 경우다.
건강, 음식, 명상, 여행 등 일상의 무수한 분야에 덮어놓고 그 말을 함부로 붙여 써버려 도대체 그 진정한 뜻이 아예 무엇인지를 모르게 만들어버렸다. 한 번 말이 유행하면 다짜고짜 경쟁적으로 갖다 붙여서 쓴다. 그 말이 닳고 헤져서 마침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대박, 행복이라는 말도 너무 흔하게 쓰여서 이제는 그 진정한 뜻이 모르게끔 되어버렸다. 통일 대박이라는 말도 행복주택이라는 말도 어쩐지 잘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격침, 정복이라는 말이 전쟁용어라기보다는 스포츠용어가 된 지 오래다.

일물일어(一物一語)라는 말이 있다. 하나의 사물에는 하나의 말이 있다는 뜻이다. 말 사용에 이런 높은 경지까지는 안 가더라도 지나치게 유행을 좇는 말 사용은 사고를 빈약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든 분야에서 창조를 원한다면 다양하고 독창적인 말 사용이 우선되어야 한다.
모든 창조의 시작은 언어로 발아한다. 수많은 좋은 말들이 선동적인 정치와 언론의 무작스런 남용에 낡고 녹슬어가는 꼴이 안타깝지만 어쩌랴. 시속이 수상한데 말인들 온전할손가. 그러나 말에는 언령(言靈)이 있으니 말복을 생각커든 가려서 쓸 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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