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 백두산 야생화
책갈피 속 백두산 야생화
  • 문틈/시인,시민기자
  • 승인 2014.06.04 1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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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의 이야기이다. 북한을 방문했던 우리 일행은 백두산 천지를 보고 나서 다시 털털거리는 닛산 버스에 올라 백두산 허리를 붕대처럼 감고 있는 급한 경사 길을 구불구불 내려왔다. 운전기사는 거의 신기에 가까운 운전솜씨로 무사히 우리 일행을 마침내 수림 경계선이 가까운 초원 지역까지 데려 와서는 잠시 버스를 세웠다. 여기서 점심을 먹고 출발한다는 것이다. 길은 이제 평지로 이어진다.

우리는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백두산 둔덕에 앉아서 점심을 까먹고 한참 야생화 밭에서 사진을 찍으며, 둔덕 초원에 앉아 쉬었다. 시간도 멈춘 듯 한가로웠다. 천둥소리를 우산대 끝에서 들었던 백두산 상상봉은 저 높은 봉우리들 너머로 숨어들었고 주위에는 온통 고산지대 백두산에만 산다는 야생화들이 햇볕에 반짝이며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나는 우리를 안내하는 북쪽 안내원에게 “저 야생화를 몇 송이 따서 백두산 등반 기념으로 가져가고 싶은데 괜찮겠소?”하고 물었다. 뿌리만 안 캔다면 괜찮다는 것이었다. 이름도 모르는 처음 보는 야생화들을 따서 가방 속에 넣었다. 나는 백두산 신령이 하늘 가까이서 핀 이 꽃들을 내게 주는 것이거니 하면서 휴지에 물을 적셔 야생화 무리를 감쌌다.

야생화를 넣은 가방을 신주단지처럼 안고 삼지연에서 비행기로 다시 평양으로, 그리고 하룻밤 평양 고려호텔에서 숙박하는 내내 나의 눈길은 온통 야생화 꽃무리가 들어 있는 가방으로 가서 몇 번씩이나 열어 들여다보곤 하였다. 마치도 무슨 귀한 생물을 분양받아 오는 심정 같았다고 할까. 야생화는 좁은 가방 안에서 웅크린 채 선연히 살아 있었다.

같이 간 일행은 아무도 내 가방 속에 백두산 야생화 꽃무리가 들어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그때 내 심정은 그랬다. 일평생 꿈이나 꾸던 백두산을 연이 닿아 오르게 되었으니 백두산 기운이라도 가져와 통일의 그날까지 오래 기리고 싶었다.

나는 평양과 묘향산에서 산 소소한 기념품들을 꺼내 일행에게 주어버리고 호텔에서도, 순안비행장으로 가는 버스에서도 오직 가방에 넣은 야생화의 안전에만 신경을 썼다. 다음날 비행기가 김포공항에 도착하여 마침내 백두산의 야생화를 ‘남조선‘으로 가져왔다. 나는 김포공항에 내려서는 순간 가방 속의 야생화를 생각하곤 내 마음이 더없이 그득해 옴을 느꼈다.

나는 집에 도착하여 가족들에게 말했다. “백두산이 준 선물을 가져왔다. 자, 이것이다.” 그러면서 가방을 열어 휴지를 풀어내고 야생화를 조심스레 드러내자 모두들 놀랐다. 그게 진짜 백두산에서 가져온 것이 맞느냐며, 마치 겨울 눈밭에서 죽순을 캐온 사람처럼 나와 백두산 야생화를 놀란 눈을 하고 바라보았다.

백두산 야생화는 전혀 흐트러짐 없이 본디 색깔 그대로 빛나고 있었다. 이름들은 알 수 없었지만 나는 한참을 그대로 탁자 위에 두고 보다가 시들기 전에 고이 책갈피에 넣었다. 어린 시절 네 잎 클로버 잎을 가지고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는 한, 두, 몇 년이 지났다. 백두산 야생화는 책갈피 속에서 납작하게 말라갔지만 내 마음 속에는 지금도 백두산에서 피어 있던 야생화가 그대로 남아 있다.

북한 동포들은 살림집이며, 입성이며, 사는 모습들이 한 눈에도 허름해 보였다. 그리고 밤에 고려호텔 44층에서 빙 돌아가는 창으로 내다보는 평양은 내 초등학교 시절 마을의 밤처럼 등불 하나 없이 깜깜해 보였다. 나는 혼자 생각했다. 못 살고, 못 입고, 못 먹고, 깜깜한 어둠 속에 살아온 야생화라서 색깔이 더 곱고 더 빛나 보이는가 보다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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