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청학련, 40년 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민청학련, 40년 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 김다이 기자
  • 승인 2014.04.10 09: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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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40주년 기념 심포지엄
기억하지 못한 역사는 되풀이 된다 되새겨야
전남대 ‘함성지’ 사건 기억해야 할 역사

최근 간첩사건 조작, 국정원 부정선거 논란 등으로 피땀 흘려 이룩한 민주화가 뒷걸음질 치고 있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역사의 뒤안길에 숨은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40년 전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

1974년 4월. 박정희 정권의 유신헌법으로 칠흑 같은 암흑 속으로 빠져들어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하 민청학련)’ 사건이 어느덧 40주년을 맞이했다. 당시를 회상하고 당시 민청학련 사건의 진상을 알리는 행사가 광주에서 열렸다.

광주전남 민청학련 동지회 주최, 전남대 5.18연구소 주관으로 9일 전남대 사회과학대학 1층 별관 11호실에서 ‘전남대 민청학련 4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어떤 내용들이 오갔을지 관심을 끌었다.

민청학련 생존 관련자들 대부분 참여해

40년 전 혈기왕성한 20대의 나이에 반유신운동을 펼쳤던 이들은 어느새 얼굴에 깊숙한 주름이 지고, 머리는 새하얗게 변했지만 심포지엄에 참석해 더욱 생동감 있는 현장 분위기가 조성됐다.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은 40년 전 유신독재 정권에 대항했던 수많은 학생들을 전국적으로 연행, 체포, 군사재판을 받게 한 사건이다. 박정희 정권은 이들을 인혁당 사건과 연루시켜 반국가적 불순세력으로 조작하고 1,024명을 조사하여 253명을 군사재판에 송치했다.

민청학련과 연관하여 민주화의 성지인 광주에서도 전남대생 18명이 끌려가 비상군법회의 재판을 받게 됐다. 1974년 4월 9일 전남대 본관에서 시위가 준비됐었지만 제대로 성사되지 못한 채 민청학련에 가담한 학생들이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 등 형벌을 받게 됐다.

당시 전남북 총책임은 윤한봉, 전남대 책임은 김상윤 등이며 최철, 이학영, 김정길, 이강, 김남주, 박석무 등 전남대와 조선대 간, 학교와 교회 간 유대 관계를 맺었고 조봉훈, 박형중, 김금해, 이세천, 노준현, 박현옥 등 광주지역 민주세력을 결성해 운동권이 확고한 사회세력으로 자리 잡게 됐다.

▲민청학련계승사업회 이철 상임대표
▲광주·전남 민청학련동지회 이강 초대회장
▲민청학련 사건 이전 지하유인물 녹두를 제작했던 박석무

이처럼 현대사의 관점에서 볼 때 민청학련 사건은 이 지역에서 민주화를 지향하는 활동가들이 처음으로 양산되는 계기였다고 말한다.

당시 민청학련으로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이철 민청학련계승사업회 상임대표는 “현재 유신 잔당이 다시 날뛰지 못하도록, 이 땅에 다시 민주주의가 후퇴하지 않도록 활짝 꽃피는 미래를 만들자라는 의미에서 오늘 행사가 뜻 깊다”며 “앞서 서울에서도 심포지엄이 있어 좋았지만 단순히 지난 역사를 기억할 뿐만 아니라 다시 자각해야할 시점이다”고 말했다.

유신헌법으로 긴급조치 9번 선포해

이날 심포지엄은 결의문 낭독에서 “40년이 지난 지금에도 이름만 바뀐 국가정보원은 대선에서 불법적인 선거운동, 진보야당의 증거를 과장 조작하여 ‘종북몰이’ 해산 시도 등 급기야 탈북한 국민에게 간첩죄를 씌우기 위해 증거를 조작해 헌법의 기본가치와 국가의 기본을 무너뜨리고 있지만 박근혜 정권은 이에 대한 사과 한마디가 없다”고 질타했다.

심포지엄의 첫 번째 주제발표로 안병욱 가톨릭대 명예교수의 ‘민청학련 운동과 긴급조치 4호’에 대한 발제가 있었다.

안 교수는 1970년대 한국사회 정황, 유신쿠데타와 폭압적 긴급조치. 민청학련운동과 인혁당 그리고 사법살인, 민청학련에 대한 조작 수사, 민청학련과 반유신 민주화운동의 특징 등으로 나누어 세세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민청학련계승사업회의 결의문을 낭독하고 있는 최철
▲'민청학련 운동과 긴급조치4호'라는 주제로 첫번째 발제자를 한 안병욱 가톨릭대학 교수
당시 박정희는 1971년 대통령 선거를 끝으로 종신집권 전략을 강구하면서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이후 분단과 통일 등 예민한 문제를 현안으로 내세워 영구집권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했다고 한다.

같은 해인 1972년 10월 17일. 박정희는 ‘대통령 특별선언’ 발표를 통해 국회 해산, 정당 중지 등 “새로운 체제로의 일대 유신적 개혁이 있어야 하겠다”며 ‘유신헌법’ 만들어 입법, 사법, 행정의 삼권을 완벽하게 대통령 한 사람에게 집중시키는 무시무시한 권한을 만들어 냈다.

안 교수는 “유신 7년간 박정희는 모두 9번의 긴급조치를 선포했고, 유신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비방하는 행위와 연루된 자들은 15년 이하의 징역 혹은 사형까지 이르렀다”며 “1974년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되면서 특별담화를 통해 민청학련이 인민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반국가적인 불순행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는 확증을 포착했다는 조작으로 희생양을 만들어냈다”고 설명했다.

긴급조치 4호가 선포된 이 날은 서울대, 이화여대, 성균관대 등 몇몇 대학에서 민청학련 이름으로 유인물을 살포하고 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후 인혁당 사건 관련자들이 민청학련을 배후 조정했다는 혐의로 인혁당 관련자 7명, 경북대에서 민청학련을 이끈 여정남을 포함 총 8명에 대해서 사형을 집행했다. 대법원의 형이 확정된 지 18시간 만에 발생한 일이다. 안 교수는 “역사는 이를 사법살인이라고 정의하고 국가범죄의 한 전형으로 구분해오고 있다”고 말했다.

▲6.15공대위 김정길 광주전남 상임대표
남산 부활절 사건보다 먼저 발생한 전남대 ‘함성지’

두 번째는 김정길 6·15 공대위 광주전남 상임대표가 ‘유신과 민청학련’이라는 주제로 발표를 이어갔다.

김정길 대표는 민청학련이 발생하기 전년도인 1973년 전남대 지하 유인물인 녹두, 함성, 고발 등 3가지 유인물이 배포되면서, 이를 읽었던 세대들이 5·18민주화운동의 중심이 됐다는 역사적 배경들을 낱낱이 소개했다.

그는 “같이 깊이 생각할 문제는 역사에서 남산부활절 사건보다 더 먼저 최초로 발생했던 전남대 ‘함성지’사건은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며 “역사 기록에 있어서 중앙집권적 정리, 중앙집권적 태도가 아직도 유지되어 오고 있다는 오늘날의 현실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른바 전남대 ‘함성지’ 사건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반유신운동으로 관련자 15명이 붙잡혀 재판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안길정 전남대 호남한문고전연구실 연구원
마지막으로 안길정 전남대 호남한문고전연구실 연구원이 ‘민청학련과 광주지역 민주화운동’을 주제로 민청학련 선배들의 위상에 대해 발표했다.

안 연구원은 “유신체제가 출범하던 1972년에 중학생이었지만 1973년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유신체제가 실감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며 “대학에 진학했을 때는 녹두서점을 자주 출입하는 것에 대해 상담지도관실로부터 공개적인 경고를 받기도 했지만 민청 선배들과 만나면서부터 유신체제를 또렷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고 털어놨다.

이어 안 연구원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도청에서 밤을 새우며 윤상원 등 항쟁지도부를 끝까지 이끌었던 학생출신 가운데 민청학련 선배들로부터 학습을 한 후배들도 있었다”며 “전업적 운동가로 살겠다고 선언하고, 질식할 것 같은 유신체제 하의 하늘을 덮은 놋쇠 솥뚜껑을 깨뜨리기 시작한 이들도 민청학련에서 나왔었다”고 설명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 민주화운동을 견인해왔던 민청학련 사건이 앞으로 후손들에게 각인될 수 있도록 정부의 정확한 역사 사실규명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모아졌다. 한국 민주화 운동사에 초석이 되는 민청학련 사건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한 때다./김다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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