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출전가
광주출전가
  • 김상집
  • 승인 2014.01.09 13: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상집
요즘 가끔 범능스님이 다비식을 치룬 다음날 나왔다는-그래서 그의 마지막 노래가 되어버린 CD ‘나 없어라’를 들어보곤 합니다.

범능스님 즉 본명인 문성인을 처음 본 것은 1982년 겨울 전용호를 통해서였습니다. 당시 전용호는 한국기독교장로회전남노회청년회 상임총무를 맡고 있으면서 교회는 화정삼익아파트 건너 무등교회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당시 무등교회는 이철우 전도사께서 한신대로 유학간 후임으로 유태규목사(김경천 전 국회의원 부군)께서 시무하고 계셨고, 청년회가 매우 활발하여 광천동 노동자들과 대학생들이 많았습니다. 동시에 들불야학을 계승한 무등야학을 열고 있었기 때문에 정보기관의 감시가 심했던 곳입니다.

어느날 전용호가 화순읍 교회 출신으로 시내 충장로 술집에서 기타 치며 즐겨 노래부르는 청년이 있는데 기장광주시찰회 청년모임을 무등교회로 할 터이니 한번 만나보라고 권유하여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5월 항쟁 직후인 당시는 선술집에서 막걸리 한잔 하며 노래 한두 곡쯤 뽑는게 보통이었는데 비록 유행가와 팝을 불렀지만 정말 노래를 잘 불렀습니다. 밥 딜런, 존 바에즈, 피터 폴 앤 매리 등 반전가수의 노래와 바위섬과 같은 노래를 불러보는게 어떻겠냐고 물어봤더니 뜻밖에도 자신이 작곡한 곡이 40여개나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광주YMCA 청년Y에서는 윤영규 선생님과 김국웅 선배를 중심으로 김원중과 소리모아를 적극 후원하고 있었기에 바로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전용호와 저는 문성인을 중심으로 기청 문화선교위원회를 만들어 미국의 흑인영가와 같은 교회내의 운동권 노래를 만들어보고자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우선 문성인에게 국악을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전남대예술대학국악과를 가도록 권유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해 그믐날 무등야학팀 전원이 도경대공분실로 끌려가 무등야학을 중심으로 광천동 노동자들을 선동하여 제2의 광주사태와 같은 내란을 모의하고 있다며 모진 고문을 받았습니다.

당시 저와 지금의 아내 모애금 약사도 무등야학에 자금을 지원하고 있다며 대공분실 지하실로 끌려가 고문과 구타에 못이겨 결국 제2의 광주내란음모가 적힌 진술서에 지장을 찍어야 했습니다.

다행히 목사님들의 항의로 풀려나긴 했지만 이 일을 계기로 전용호는 기청상임총무를 그만두었고 저도 광천동 노동자들의 소모임을 잠시 중단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동신강건 노조설립문제로 또다시 조사를 받게 되자 다시 피신을 하게 되어 한동안 문성인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전용호 후임으로 이승정(현 부산중부교회 목사)이 상임총무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철우, 전용호는 비록 소액이나마 노회에서 활동비를 지원받았지만 이승정은 이미 활동비지원이 끊긴 상태여서 재정이 아주 취약한 상태였습니다.

그렇지만 노동자 소모임과 한얼야학 등 야학사업을 기장노동청년회로 조직하여 내가 맡고, 문성인을 기청문화분과의 위원장으로 임명한 다음 사물을 구입하여 필봉농악전수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문성인은 85년 피리전공으로 전남대예술대학국악과에 합격하여 김광복교수에게 사사받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기청부총무였던 최은기가 문성인에게 기청전국대회 때 부를 기청출전가를 작곡해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당시 기청전국대회는 75년부터 매년 보통 1천여 명의 기장교회청년들이 815광복절에 3박 4일로 모여 치루는 대회로, 이때 시국성명서를 채택하고 가두진출을 하며 한해의 대미를 장식하는 전국에서 유일한 대중 집회였습니다.

그런데 대회 때마다 복음찬송인 ‘우리 승리하리라’나 ‘정의가’, ‘투사의 노래’ 등을 부르는데 이보다는 5월학살의 진상을 규명하는 보다 결연한 행진곡풍의 노래로 작곡해달란 것이었습니다.

마침내 문성인이 작곡을 해왔습니다. 이 곡에 최은기가 작사를 하였는데 첫 가사는 “기청년 동지들 함께 나가세~” 였습니다. 나머지 가사는 지금의 광주출전가와 똑같습니다. 마침내 85년 부산대회에서 2박3일동안 열심히 이 기청출전가를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 정문을 뚫고 가두로 진출하던 날 정문을 막아선 경찰과 대치하게 되었습니다.

두세번의 충돌이 있고 점점 대치상황이 격렬해지자 기청출전가에 낯선 청년들은 ‘우리 승리하리라’나 ‘정의가’, ‘투사의 노래’ 등으로 노래를 바꿔 부르게 되었습니다. 기청출전가를 부르면 조용하고 ‘우리 승리하리라’나 ‘정의가’, ‘투사의 노래’ 등을 부르면 모두 합창을 하자 이제 더 이상 기청출전가를 부르지 않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실망했습니다. 기청전남연합회 문화분과의 첫 작품이 실패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몇 달 후 최은기와 김병환이 주축인 전남대 학생운동세력이 집회때 이 노래를 들고 나왔습니다. 제목을 ‘광주출전가’로 바꾸고, 첫가사도 ‘기청년 동지들’을 ‘동지들 모여서’로만 바꿔서 부른 것입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전국 모든 대학생들의 시위는 ‘광주출전가’로 뒤덮이게 되었고 5월학살의 진상을 규명하는 투쟁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후 문성인은 ‘꽃아 꽃아’ ‘하늘길’ 등 5월해원 노래를 다수 작곡하였습니다.

예명을 ‘정세현’으로 바꾼 문성인은 노래패 ‘친구’ 활동을 하다 1993년 입산하여 범능스님이 되었습니다. ‘산문’ ‘먼산’ 등은 입산후 작품으로 많은 불교명상음악이 있습니다.
 

최신 HOT 뉴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