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시립미술관, 만물상-사물에서 존재로
광주시립미술관, 만물상-사물에서 존재로
  • 정인서 기자
  • 승인 2013.09.04 16: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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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사물이 어떻게 작품이 되는가를 추적하는 난해함

“엄마, 이것이 머야?”
일곱 살쯤 되어보이는 한 여자아이가 엄마에게 묻는다.
“응~, 이건 너 레고 해봤지. 그런거야”
“그런데 왜 여기 있어.”
“저건 길거리에 걸려있는 거 아냐?”
“글쎄, 현수막이 왜 여기 걸려있지. 엄마도 궁금해!”
우리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모든 만물이 작품이 될 수 있을까?
마르셀 뒤상의 ‘변기’가 작품이 되었던 이후 사물에 대한 새로운 시각 교정을 일으키고 있다. 문제는 점점 미술작품이 쉬운 것 같으면서 난해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게 작가의 심오한 철학과 가치를 가진 정신세계로부터 만들어진 것인지 아니면 작가라는 이름을 붙인 이들의 정신적 끄적거림의 표출인지를 알 수 없다.
광주시립미술관에서 2013광주디자인비엔날레를 기념하는 특별기획전 <만물상-사물에서 존재로> 전시에서도 그러한 이야기를 다시 한 번 질문할 수 있다.


광주시립미술관측은 <만물상-사물에서 존재로>전은 미술 속 사물이 지닌 다양한 존재 방식을 통해 Art와 Non-Art 사이의 경계 혹은 예술과 일상 사이의 경계를 보여주고자 마련했다고 이야기한다.
전시는 9월 3일부터 11월 10일까지이다.
현대미술은 점점 다원화되고 있다. 작가마다 자신의 양태에 따라 다양한 실험과 개념적 성격이 강화되고 있다. 그러다보니 일반인들의 시각으로는 적응하기 어려운 이해불가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더욱이 현대미술은 이미 과거 미술사와의 안녕을 고하고, ‘미술이란 무엇일까?’라고 하는 미술의 정의에 대한 자기 성찰의 단계, 즉 철학의 세계로 진입해 버렸다. 이제 미술은 눈으로 보는 시각 예술이라기보다 눈으로 읽고, 온갖 경험과 상식, 인문학적 지식과 철학적 사고를 총동원해서 머리로 해석해 내야 하는 일종의 텍스트와 같은 것이 되어 버린 것이다.


현대미술과 일반인들의 이해도 사이 간격은 미술의 영역 안에 오브제가 들어오면서부터 가속화되고 심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브제는 일반적으로 물건, 물체, 객체 등을 가리키는 말로서, 미술에 있어서 오브제는 사물을 일상세계에서 떼어냄으로써 그것에서 다양한 의미와 인식을 유추해 낼 수 있게 한다.
입체파에서 단순한 보조적 수단으로 등장했던 오브제는 현대에 와서는 그 자체로써 예술품으로 독립되는 과정을 거쳐, 개념과 관념의 대상으로까지 역할과 의미가 확대된다. 특히 일상적인 사물, 장소 등 그 어떠한 대상이라 할지라도 작가의 의도와 개념에 의해 존재로서의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대중과 미술사이의 괴리상황을 인식하며, 오브제의 탐색을 통해 예술과 일상,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와 해체의 지점을 보여주려는 것이 기획 의도라고 한다. 과연 그럴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일상의 평범한 사물들의 집합소를 방불케 할 이번 전시는 미술의 영역에 진입한 사물들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하지만 어린 아아들의 일상생활에서 흔히 보는 물건, 때로는 버려진 것들의 집합현장을 볼 지도 모른다.
참여작가는 고근호, 마C, 방명주, 성진기, 신양호, 유현미, 이근세, 이득영, 이매리, 이세경, 이원호, 이진경, 정운학, 정재철, 조미영, 최정화, 허수영, 홍승희, 황연주 등 총 19명이다.
다만 기획의도대로 <만물상-사물에서 존재로>전에서 보여준 익숙한 사물의 기발한 변신을 통해 미술과의 즐거운 만남이 되고, 나아가 현대미술의 난해함이 친근한 것으로 인식이 전환되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되길 기대해 본다.

*전시 기획의도

사물에서 존재로 : 시각예술에서 철학의 단계로 진입한 현대미술

                                                                                   광주시립미술관 학예연구사 김희랑

 * 가깝고도 먼 미술

 일반인들은 현대미술을 어떻게 생각하며,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을까? 회화나 전통적 조각 이외의 다소 실험적인 현대미술을 접했을 때 보통사람들은 ‘저것도 미술일까?’, ‘저건 나도 하겠네~’, ‘도대체 무슨 뜻이지?’ 등등의 생각을 하게 된다. 일반인들은 보통 미술을 벽에 걸린 회화 -야수파니 인상파니 초현실주의니 하는 양식의 그림들- 로 이해하는 정도이다. 물론 학창시절 숙제나 체험활동을 위해 미술관을 방문하기 시작한 세대부터는 그 이해의 수준이 다소 다를 수 있다. 그러나 그들마저도 ‘그림도 아닌 것, 이상한 것도 미술이 될 수 있구나!’하는 정도이지 어떤 근거로 그것들을 작품이라 부르는지, 그것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울 따름이다.

 현대미술은 점점 다원화되고 있으며, 다양한 실험과 개념적 성격이 강화되고 있어 일반인들의 시각으로는 적응하기 어려운 이해불가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더욱이 현대미술은 이미 과거 미술사와의 안녕을 고하고, ‘미술이란 무엇일까?’라고 하는 미술의 정의에 대한 자기 성찰의 단계, 즉 철학의 세계로 진입해 버렸다. 이제 미술은 눈으로 보는 시각 예술이라기보다 눈으로 읽고, 온갖 경험과 상식, 인문학적 지식과 철학적 사고를 총동원해서 머리로 해석해 내야 하는 일종의 텍스트와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이번 전시 <만물상-사물에서 존재로>는 대중과 미술사이의 괴리상황을 인식하며, 오브제의 탐색을 통해 예술과 일상, 예술과 비예술의 경계와 해체의 지점을 보여주고자 마련되었다. 일상의 평범한 사물들의 집합소를 방불케 할 이번 전시는 미술의 영역에 진입한 사물들의 다양한 모습을 통해 현대미술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 탈역사적 미술의 시대라 불리는 오늘날, 회화 이외의 다양한 형식과 매체들은 개념적 구조물을 구축하며 상호보완적 혹은 신축적으로 결합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오브제를 이용한 다양한 표현방식과 다양한 의도들을 탐색해 봄으로써 미래 전개될 미술의 양상을 가늠해 보는 기회가 될 것이다.

 * 오브제의 역사 : 사물에서 존재로

현대미술과 일반인들의 이해도 사이 간격은 미술의 영역 안에 오브제가 들어오면서부터 가속화되고 심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오브제는 일반적으로 물건, 물체, 객체 등을 가리키는 말로서, 미술에 있어서 오브제는 사물을 일상세계에서 떼어냄으로써 그것에서 다양한 의미와 인식을 유추해 낼 수 있게 한다. 즉 주제에 대응하여 일상적 합리적인 의식을 파괴하는 물체 본연의 존재 방식을 지칭한다. 광범위한 오브제의 범주를 따지자면, 과거 예술작품의 주제나 소재, 즉 작품의 대상이 되는 외부세계도 포함된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대상으로서의 오브제 자체가 작품 안으로 들어와 전면에 등장한 것은 입체주의부터이다.

 이후 마르셀 뒤샹에 의해 평범한 일상의 사물 -레디 메이드- 은 전시장에 옮겨져 와 작품으로서 의미부여를 받기 시작한다. 뒤샹의 시도는 전통적 미적 판단과 예술의 정의를 규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정하는 미술사의 대사건으로 기록된다. 이것은 기성품의 일상적 지위를 작품으로 격상시킨 것인데, 이때 일상적 사물이 미술품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작가의 의도와 메시지가 잘 나타나야 한다. 나아가 그 의도는 관람자 -비평가, 일반관람자- 에 의해 미적 관점에서 받아들여져야 한다. 뒤샹의 시도는 후에 요셉 보이스에 의해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될 수 있다’ 또는 앤디 워홀에 의해 ‘대중 소비 사회에서 상업적인 대량문화의 시대정신을 미술로 표현하겠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시도들을 보며 미학자 아서 단토는 ‘예술의 종말론’을 통해 내러티브적으로 구성된 미술사 -기존 양식으로서의 미술사- 의 종말을 선언한다. 즉 뒤샹이 미술가가 만들지 않더라도 미술품이 될 수 있음을 발견한 것과 같이 미술품이 되기 위해서 반드시 지녀야 할 특정의 양식이란 없다는 것이다. 이것에 특히 기여한 것을 팝아트로 보았고, 팝아트를 통해 이제 미술이 ‘미술이란 무엇인가’, ‘예술과 비예술의 차이, 경계는 무엇인가’라는 자기 반성적 물음을 시작했다고 보았다.

 또한 다다, 초현실주의, 팝, 네오다다, 누보레알리즘 등에서 오브제와 오브제 혹은 오브제와 이미지의 결합 등 다양한 양상으로 오브제는 활용된다. 이때의 오브제는 뒤샹의 일상적 것에 대한 인식의 변화, 즉 기존에 통용되던 오브제 의미의 박탈과는 달리 ‘표현수단’으로서 사용된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는 오브제 간의 결합을 통해 새로운 의미를 창출하며 가장 널리 사용되는 일반적인 형식이다. 개념미술, 대지미술, 환경미술에서 오브제는 단순한 사물이나 인공물의 사용을 넘어서 대자연의 현상과 자연물 자체로까지 확장된다.


이처럼 입체파에서 단순한 보조적 수단으로 등장했던 오브제는 현대에 와서는 그 자체로써 예술품으로 독립되는 과정을 거쳐, 개념과 관념의 대상으로까지 역할과 의미가 확대된다. 특히 일상적인 사물, 장소 등 그 어떠한 대상이라 할지라도 작가의 의도와 개념에 의해 존재로서의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일상의 사물, 지극히 평범했던 것이 존재로서 특별한 인식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의 인식이 변화를 일으켰다는 의미이다.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라는 대목이 있는데, 그는 그대로인데 그를 바라보는 나의 인식이 변하여 그를 ‘꽃’이라는 의미 있는 존재로 재인식했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다. 일상적인 사물이 미술품으로의 변용된 사실이 미술사에서 그토록 중요한 이유는 동일한 사물을 달리 인식하는 사유의 문제를 제기하게 했기 때문이다. 즉 인식 가능성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된 것이다.

 * 전시의 구성

 전시는 ‘사물 기억’, ‘일상의 변용’, ‘사물의 언어’라는 세 섹션으로 구분되어 사물의 수집과 기억, 평범한 것들의 변용, 개념적 철학적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사물로 변모해 가는 다양한 양상을 보여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섹션구분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며, 전시구성의 편의상 구분으로 상당수의 작가는 그 경계를 넘나들고 있음을 밝힌다. 전시 작품들은 전시실 이외에 미술관 테라스와 야외까지 설치되어 동일기간 같은 사이트에서 개최되는 광주디자인비엔날레와의 연계성을 갖고, 공원을 찾는 시민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할 것이다.

 먼저 첫 번째 섹션 ‘사물의 기억’에서는 사물 -일상, 공간, 풍경 등 외부세계- 에 대한 기억과 경험을 담아내는 작업, 사물의 수집과 재조립․재생산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작업, 특별한 의미를 지닌 개인의 컬렉션 등을 소개 한다.

황연주는 사소하고 평범하지만 특정 개인에게 소중했었던 물건들을 수집하고, 그들의 특별한 사연을 담아낸다. 하찮을 수도 있는 사물에 대한 기억과 교감이 개인의 자아형성과 삶의 중요한 근간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조미영의 작품은 우연히 방문하게 된 섬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얻은 개인적 체험이 시발점이 되었다. ‘섬’ 시리즈는 대칭의 도시 구조물들이 공중에 떠있는 형태로서, 물속에 잠겨있는 섬을 연상시키며 작가의 심리적 공간을 보여준다. 한편, 물에 잠겨있는 도시의 모습이기도 한 ‘섬’은 부유하는 존재로서 본질을 숨기고 사는 현대인의 표상을 보여주는 듯하다.

이득영은 헬기나 배를 타고 이동하며 촬영한 사진 연작을 통해 이미 낯익은 모습의 풍경을 새로운 관점을 통해 재해석된 모습으로 제시한다. 한강과 테헤란로 시리즈에 이어, 작가는 에버랜드로 대표되는 공원의 이미지를 ‘낙원’의 개념으로 접근한다. 사전 데이터 분석과 고공촬영이라는 상황 상 야기되는 날씨나 허가 관련 난제, 촬영 후 출력작업 후에 탄생한 그의 작품은 기성의 장르특성과 차별되는 작가 고유의 미학과 함께 우리가 보지 못했던 새로운 풍경을 탄생시킨다.
통상 1년 단위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옮겨 다니며 작업하는 허수영은 특정 지역의 풍경을 일기형식으로 그린다. 매일매일 혹은 매 계절의 변화를 담고 있는 그의 그림은 특정 장소에 대한 기록과 재현의 누적이자, 특정 지역의 체험과 기억과 시간의 흐름이 녹아들고 중첩된 표현의 장이다.

철학가 성진기의 ‘촛대’는 오랜 세월 모아 온 개인의 컬렉션이다. 촛대 하나하나에는 장인의 정신과, 그것을 사용했던 사람들의 애환, 컬렉터와의 각별한 사연이 담겨 있다. 또한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철학자의 삶과 고뇌가 빛과 온기를 전달하는 매개체로서의 촛대와 닮아있다. 수집가는 ‘촛대’라는 사물의 역사와 생명력, 사람들과의 교감 등을 함께 공유하는 자리가 되길 기대한다.

또 다른 수집을 보여주는 고근호는 취미로서의 수집이 예술가에게 어떠한 영감을 주었는지를 보여준다. 스틸을 레이져 컷팅하여 조립하는 과정으로 만들어지는 고근호의 조각은 그 형태뿐만 아니라 어린시절부터 장난감을 통해 느꼈던 즐거운 기억이 그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

신양호는 완성품의 수집이 아닌, 세상 어딘가에서 중요한 물건의 한 부분으로 역할을 다하다 버려진 부속품들의 수집과 부활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서 신양호는 작품제작 시연회를 할 예정인데, 이때 부속품들은 관람객이 놓고 가는 물건들을 모아 사용할 것이다. 쓰레기와 예술품, 버림과 간택(揀擇)의 경계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두 번째 섹션 ‘일상의 변용’은 우리 주변의 평범한 사물들이 미술의 영역 안에서 어떠한 기발한 변신을 보여주는지 제시한다. 일반인들에게 가장 친근하고 생활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 스토리를 기대할 수 있는 섹션이다.

두 번째 섹션은 야외에 설치된 최정화의 작품에서 시작된다. 최정화는 일상의 상업 제품을 그대로 가져와 배열하고 집적시키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그는 대중문화의 상업성과 대량생산으로 시대정신을 표현한 앤디 워홀의 사상을 이어 받은, 한국이 낳은 세계적 팝 아티스트라 할 만하다. 그러나 최정화는 대중문화와 상업성, 자본주의에 대한 동조보다 그로 인해 발생되는 허무함과 폐해 등 경고의 메시지를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갖는다. 야외에 설치된 최정화의 ‘흔들흔들’은 공원안의 수많은 나무들과 함께 바람 따라 흔들거리며, 플라스틱 바구니의 즐거운 변신을 보여준다.

정재철은 중국, 파키스탄, 터키, 네팔, 인도, 베트남 등 세계 곳곳에 폐현수막을 보내고, 그것들이 어떻게 재활용되는지를 7년이라는 긴 시간의 여정을 통해 기록하고 채집하였다. 이것은 ‘삶이 예술이고, 여행이 미술’임을 실행해 보이고자 기획된, 공공성을 지닌 개인 여행의 기록이자, 예술 프로젝트이다. 그의 작품은 일상적 사물의 쓰임새와 인식이 지역마다 삶의 형태와 문화적 배경에 의해 어떻게 달라지는지를 보여준다.
MaC는 비닐천막이라는 예술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는 재료 위에 바느질이라는 지극히 일상적 삶의 행위로써 그림을 그려간다. ‘이것은 예술이고 저것은 예술이 아니다’ 혹은 ‘이것은 고급예술이고 저것은 저급예술이다’라는 이분법적 미적 판단과 예술이 지닌 권위성에 대한 대항이다. 작가는 예술이 삶과 유리된 소수 특정인들을 위한 유희가 아니라 삶의 애환이 응축되어 표출되는 장으로 존재하길 바란다.

이진경의 작품은 MaC와 유사한 맥락을 갖고 있다. 그녀는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예술, 인간적인 예술의 전형을 보여주는 활동을 해왔다. 컴퓨터와 모바일의 활용이 일상이 되어버린 이 시대, 과연 손 글씨 편지를 주고받아 본 게 언제 적 이야기던가? 질펀한 전라도 사투리나 시골에 사는 늙은 어머니가 딸에게 보내는 편지 등 가슴 아련한 사연을 손 글씨로 써낸 이진경의 작품은 뜨끈뜨끈한 된장국에 묵은지가 그리워지는 정겨운 향수를 느끼게 한다.

방명주의 경우 우리주변의 먹거리를 근접 촬영을 통해 색다른 풍경으로 착각하게끔 한다. ‘부뚜막’ 연작에서는 밥알, 누룽지, 뱅어포 등을 ‘매운 땅’ 연작에서는 고춧가루더미를 통해 음식이라는 아주 익숙한 사물을 낯설게 제시함으로써 의외성과 색다른 재미를 준다.

이세경은 도자기 위에 머리카락으로 그림 그리기를 시도한다. 얼핏 보아 특별할 것이 없어 보이는 고급 도자기로 보이지만, 그림의 재료가 머리카락이라는 사실 -미술의 재료로서 낯선 머리카락의 정체와 작가의 정교하고 노련한 솜씨로 인해- 은 보는 이를 경탄하게 한다. 이세경의 도자기는 쉽게 구할 수 있는 보통의 자기일뿐이고, 불결함 혹은 공포심을 유발시키는 머리카락으로 그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물관의 값비싼 소장품처럼 진열한 그녀의 작품은 마치 귀중한 유물처럼 느껴진다. 사물이 그 존재 방식에 따라 어떻게 인식되는가를 보여주는 예이다.

 세 번째 섹션 ‘사물의 언어’는 일상의 오브제나 이미지를 개념적 발상을 동원해 변형함으로써 예술의 본질에 대해 질문하거나 예상치 못한 사고의 확장을 유도하는 작품들을 소개한다.

이원호는 테니스 코트장 또는 탁구대 위에 존재하는 ‘하얀 선(The White Field)’에 주목한다. 경기의 규칙, 즉 공공적 합의를 나타내는 경계, 즉 ‘하얀 선’은 인간세상의 약속과 규범, 법률과 같은 차원의 것이다. 이를 제거한 후, 그것의 양 만큼 다른 경계를 만들어냈을 때 사람들은 무엇을 느낄지, 동일한 사물의 존재 형태에 따라 달라지는 인식의 문제를 다룬다.

정운학은 투명한 신발이나 책, 컵, 플라스틱 용기와 같은 일상의 사물과 빛을 결합시키는 작업을 한다. 이때 빛은 어둠을 밝히는 역할뿐만 아니라 그 대상을 승격시키는 상징성을 만들어 낸다. 대상의 본질은 그대로 있으나 빛의 변화에 따라 그 존재는 시시각각 다른 모습으로 지각되어진다. 정운학은 빛을 매개로 사물과 감각이 무엇인지, 사물과 감각 사이의 관계와 상호작용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이매리의 작품은 유럽의 로톤다(rotunde) 건축양식을 차용해 만든 일종의 성소(聖所, sanctuary)와 같은 공간이다. 즉, 사회적・역사적으로 권력, 불합리, 부조리, 불평등 등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당한 영혼, 상처받은 자를 위로하는 진혼의 장소이다. 하이힐의 집적으로 만들어진 구조물이지만, 피해자로서 여성이라는 특정한 성을 의미하고 있지는 않다. 어떤 시대냐, 어느 사회냐, 어떤 맥락이냐에 따라 상황과 희생의 대상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공간은 타인에 위한 위로의 장소이자, 자신을 반성하고 상처를 치유하는 사유의 장소가 된다.

이근세의 작품은 얼핏 보아 철물점에 흔히 볼 수 있는 공구들 같이 보이지만, 일반적인 도구로써의 쓰임새보다는 저마다 특별한 순간, 엉뚱하고 특수한 기능을 발휘하는 물건들이다. 장난 같아 보이는 그의 엉뚱한 제작활동의 저변에는 이 시대의 부조리와 불합리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 담겨있다.

홍승희는 삶의 무게, 무기력 등 인간사에서 느끼는 보편적인 감정들 -보이지 않는- 의 깊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물에 전이시켜 표현한다. 작가의 경험과 내적 심리상태는 움직임을 동반한 사물의 어느 한 순간에 실려 가시화 되는데, 이를 위해 작가는 의도적인 중력과 시간의 개념을 사물에 적용시킨다. 사물을 통해 보여 지는 순간의 흔적은, 전후(前後) 공간과 시간, 감정의 흔적이자 존재의 본질에 대한 반영이다.

유현미는 실재 사물 -인간을 포함한- 위에 회화를 덧입혀 입체화하고, 의도된 회화적 공간 안에 설치한 후 사진으로 담아냄으로써 초현실적 장면을 연출한다. 그녀의 작품은 장르 간 유연하고 탄력적인 결합을 통해 현실과 비현실, 의식과 무의식, 일상과 꿈 사이의 모호한 경계를 넘나든다. 특히 영상작품의 경우, 움직임을 통한 시간 개념의 이입, 무생물인 사물의 풍경과 살아있는 인간 감각의 접목, 스토리의 전개 등을 통해 예기치 않은 충격과 혼란 속의 즐거움을 가중시켜 준다.

 * 글을 마치며

 일반적으로 예술은 어려운 것이고, 쉽게 만날 수 없는 세계의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공연예술이나 음악에 비해 미술은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약간의 인식의 전환만 가져온다면, 작가의 의도와 메시지에 귀 기울여보고, 잠시 생각해 본다면, 두려운 대상이 아니라 즐기는 대상으로 바라본다면, 미술은 그렇게 먼 나라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번 전시는 미술 속 사물이 지닌 다양한 존재 방식을 통해 Art와 Non-Art 사이의 경계 혹은 예술과 일상 사이의 경계를 보여준다. 또한 평범한 사물과 예술작품 사이에서 발생하는 인식의 문제를 제시함으로써 미술의 미학적․일상적 가치에 대한 다양한 논의를 제공한다. <만물상-사물에서 존재로> 전에서 보여준 익숙한 사물의 기발한 변신을 통해 미술과의 즐거운 만남이 되고, 나아가 현대미술의 난해함이 친근한 것으로 인식이 전환되는 의미 있는 시간이 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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