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단상 ⑤피의 석가탄신일, 운동권은 도망갔다
5월 단상 ⑤피의 석가탄신일, 운동권은 도망갔다
  • 김상집 5.18민주유공자회설립추진위원장
  • 승인 2013.07.19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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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집 5.18민주유공자회설립추진위원장
21일 아침 우리는 도청을 제외한 광주 일원을 장악했다.
윤상원형을 찾아온 동생 윤태원과 함께 YMCA 앞까지 갔다. 도청담과 분수대 주위로 불탄 차량들이 즐비했다. 군인들이 도청 앞을 바리케이드로 막고 있었다.

분수대 앞에는 ‘부처님 오신 날’이라는 간판기둥이 서 있었다. 돌아오는 길에 중앙국민학교 후문에 세워진 도로공사 덤프트럭에 올라가 키박스를 뜯어 배터리선을 시동모터에 연결하여 시동을 건 다음 차를 운전했다. 군대에서 달구지를 운전하던 실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조수석에 윤태원이 앉았다. 트럭을 몰고 백운동, 지원동, 산수동, 중흥동 등을 돌아보았다. 가는 곳마다 시민들의 환영은 대단했다. 음료수, 주먹밥, 심지어는 누룽지까지 차 위로 올려주었다.

차를 운전하고 다니다 서점 앞에서 윤상원형을 만났다. 형은 “도청 옥상에서 헬기가 2분 간격으로 떴다 앉았다 하는데 아마도 어제 죽은 사람들을 서해바다로 빠뜨리는 모양이니 사람들을 오후 1시에 도청으로 모이도록 하자”고 했다. 만나는 차량마다 멈춰 세우고는 “1시에 카톨릭센터 앞으로”를 외쳤다. 그러자 적재함에 타고 있던 시위대가 지나는 차량마다 “1시에 카톨릭센터 앞으로”를 외쳐주었다.

거리에는 아세아자동차에서 쏟아져 나온 군용트럭과 지프차들이 쉬지 않고 달리고 있었다. 차량들마다 ‘1시에 카톨릭센터 앞으로’를 외치고 있었다.

오후1시 카톨릭센터 앞, 군용트럭 3대를 나란히 앞세우고 나는 두 번째 줄 왼쪽에서 덤프트럭을 운전했다. 인도에 인파가 가득했다. 태극기가 앞으로 내려오는 것을 신호로 시위대들은 일제히 차량을 앞세우고 몰려갔다. 어젯밤 시위도중 죽은 자들의 시체를 구조하기 위해 시민들이 모든 차량에 탑승하여 도청을 점령하자는 것이었다.

그때 갑자기 드드득 하는 M16 총소리가 들려왔다. 우측에 있던 차가 놀라 가로수를 치받고 나뒹굴었으며 나머지 두 대는 황급히 뒤로 빠져나갔다. 나는 얼른 차를 돌려 덤프트럭의 철판이 도청쪽을 향하게 하고는 차를 세웠다. 트럭 안에서 몸을 움츠리고 있는데 도로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총이 맞아 고꾸라졌다. 차마 눈뜨고는 볼 수 없는 광장이었다.

총소리가 멈췄다. 옆에 있는 윤태원에게 쓰러져있는 사람들을 태우라고 했다. 십여 명의 부상자를 트럭에 실은 후 급히 금남로를 빠져 나왔다. 박인천씨집 골목으로 꺾은 다음 시민관(현 한미쇼핑) 쪽으로 가니 왼쪽에 병원이 보였다. 병원 앞에서 경적을 눌렀다. 간호원과 의사들이 뛰어나와 피범벅이 된 부상자들을 병원으로 옮겼다. 백주 대낮에 발포한 사실이 아무래도 예사롭지 않아 운전대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윤태원이와 급히 서점으로 돌아왔다.

마침 서점에는 윤상원형을 비롯한 많은 선배들이 있었다. 도청 발포 사실을 모르는 정상용형과 이양현형은 박카스병으로 화염병을 만들고 있었다. 화염병이 작아야 잘 던질 수 있다는 것이다. 나는 형들에게 도청앞에서의 발포 사실을 애기하고 아무래도 계엄군이 진주할 것 같으니 서점을 철수하자고 했다.

곧바로 보성기업(태평극장 부근)에 연락해서 일단 그곳으로 집결하기로 했다. 녹두서점문을 닫고 안길정과 함께 보성기업으로 갔다. 이미 보성기업에서는 정상용, 윤상원, 이양현, 윤강옥, 박효선, 정해직, 박영규, 김영철 씨 등 많은 선배들이 모여 앞으로의 대책을 숙의하고 있었다.

그때(오후 3시쯤) 화정동에 사는 정상용형의 형수로부터 전화가 왔다.
“상무대 앞에서 20여 대의 군용트럭이 화정동에서 시내로 진입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 모인 30여 명은 이제는 어쩔 수가 없구나 싶어 ‘각자 자구책을 강구하여 피신하되 죽지 않고 살아서 만나자,’ ‘꼭 살아남아 역사의 증인이 되자’며 헤어졌다.

나는 형수(정현애 광주시의원)와 형수의 여동생(정현순 목사)과 함께 보성기업을 나섰다. 형수님께서 아무래도 산수동 집은 산밑이라 위험할 것 같아 선교사들이 많이 사는 양림동으로 피신하기 위해서였다. 광주천을 따라 걸어가는데 무기를 실은 차량이 눈에 띄었다. 형수에게 먼저 가라고 한 후 나는 차량으로 다가갔다.

“총 어디서 났소?” “화순에서 가지고 왔소.”
나는 곧바로 전대병원 쪽으로 갔다. 그 곳에서는 트럭에서 무기를 내리고 있었다. LMG와 캐리버 50도 있었다. 총을 가진 시민들이 사용법을 잘 모르는 것 같아 나는 총을 들어 한방을 쏜 후 총 쏘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누구가가 전남대병원 옥상에 LMG을 설치하러 간다며 나에게 함께 가자고 했다.

나는 따라가지 않고 카빈 한 정과 탄창 2개를 받아들고 무기가 얼마만큼 들어오는지 살펴보려고 지원동쪽으로 향했다. 그때 500MD헬리콥터가 저공비행을 하며 우리 머리 위를 맴돌고 있었다. 옆에서 헬기를 맞춰 떨어뜨리라고 독촉 하였지만 나는 차마 쏠 수가 없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 부대에 근무하였던 것이다. 옆사람이 내가 쏘지 못하고 있자 총을 가져가버렸다.

계속해서 보성기업과 삼화신협에 연락을 해보았으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원래 광천동 시민아파트 들불야학에 연락하다가 안 되면 김영철 선배집으로 연락하고 그래도 안 되면 삼화신협 상무인 김길만 선배에게 연락하기로 되어 있었다. 안 되겠다 싶어 나는 무기 확보량을 확인하고 싶어 지원동 다리 입구에 서서 화순방면에서 들어오는 차량마다 정차시켜 반입되는 무기의 양을 점검해 봤다. 30여분 만에 1백여 대의 차량(?)이 모두 무기를 가득 싣고 들어왔다. 이 정도의 무기면 싸워볼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6시에 광주공원으로 모인다는 소식을 사람들로부터 전해 들고 광주공원으로 갔다. 공원은 많은 사람들로 혼잡을 이룬 가운데 한쪽에서는 무기를 나눠주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어떤 청년이 지휘자를 뽑자고 제안했다. 지원자가 나타나지 않자 그 청년이 지휘자로 나섰다. 후에 알고 보니 그들이 바로 김화성, 김원갑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운동권에서 전면적으로 나서지 않았기 때문에 앞장서는 사람들이 비록 복면을 하고 모자를 써버려 눈만 보이는 상태로 서로가 누구인 줄은 몰랐지만, 나는 믿는 마음으로 상황에 대처했다. 어느 정도 체계가 잡히자 우리는 2인 1개조로 도청을 포위하기로 하고 학동, 금남로, 황금동, 계림동 쪽에서 한 블록씩 도청을 향해 전진했다.

7시경 도청으로 들어가보니 이미 공수들은 조대 뒷산으로 퇴각해 버리고 도청 안의 화단에 시체들만 있었다. 우리는 신원 확인을 해야 한다며 화단에서 시체를 파내었다. 그러나 시민군 가운데 당최 아는 사람이 없어 나의 무모한 행동이 운동권에 피해를 줄까 염려되었다. 그 후 도청을 빠져나와 유동에 있는 친구 노준현의 누나(노영숙, 오월어머니의 집 사무국장)집으로 가서 노준현의 소식을 일러주고 잠을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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