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단상 ⑦ 대학생과 향토예비군의 재무장
5월 단상 ⑦ 대학생과 향토예비군의 재무장
  • 김상집 5.18민주유공자회 설립추진위원장
  • 승인 2013.06.14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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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집 5.18민주유공자회 설립추진위원장
26일, 분수대에 방송장비를 설치하고 YWCA에서 쉬고 있는데 궐기대회를 진행 중이던 임영희, 김태종 등이 달려와 ‘시민결의문’을 낭독해 달라고 했다.

똑 같은 사람이 매일 분수대에 올라가 이것저것 낭독하자니 속보인다며 나는 자주 얼굴을 보이지 않았으니 한 번 더 읽어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분수대에 올라가 ‘민족의 이름으로 울부짖노니, 살인마 전두환을 공개 처단하라’, ‘예비군은 도청으로 와 무기를 들고 광주를 지키자’ 등 6가지 결의사항을 80만 광주 시민의 이름으로 낭독한 후 만세삼창을 부르고 내려왔다.

궐기대회 후에 어제와 마찬가지로 태극기를 앞세우고 전남대 스쿨버스를 운전하며 광주역-광주공원-금남로를 돌며 시가행진을 했다. 스쿨버스위에서는 목포에서 광주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 파견되어 온 남녀가 공수들의 만행을 목격하고는 자청하여 가두방송을 하였다.

나는 시민결의문 낭독자로서 가두행진을 마친 예비군 300여 명과 함께 총기지급을 요구하며 도청 정문 앞에 앉아 연좌데모를 벌였다.

군대를 갔다 온 예비군들이 무장을 해야 계엄군을 상대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상황실장인 박남선 씨가 무기는 안 된다고 하였으나 정상용과 윤상원 형 등이 설득하여 총기지급을 약속하자 예비군들은 YMCA로 들어갔다.

나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궐기대회 방송을 듣고 YWCA로 모인 70여명의 대학생들을 분대 편성했다. 그런데 학생들은 이제부터 광주를 지켜야 할 시민군의 결연한 자세를 보이지 않았다.

사실 윤상원형은 아침에 YWCA에 찾아와서 말하기를 어제 초소에 배치된 학생들이 거의 대부분 총을 놔둔 채 사라져버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부터 너희들은 제2의 생명인 무기를 지급받으러 간다. 이제는 학생이 아니라 시민군이다”라는 것을 인식시키고 흐트러진 군기를 잡기 위해 제식훈련을 하며 몇 명을 시범적으로 호되게 다루었다.

그런 후 학생들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를 적으라고 했다. 그리고 학생증과 주민등록증을 모두 회수하고 서로 이름을 부르지 말고 몇 분대 몇 번의 번호만 부르도록 했다.

우리가 싸우다 죽더라도 국가유공자로서 예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며 증거물로 남기려고 했다. 그러나 27일 새벽 계엄군이 쳐들어오자 당시 사망한 박용준이 증거를 없앤다며 태워버렸다.

어느 정도 규율을 잡은 후 절도 있는 행동으로 “1분대부터 번호 맞춰 앞으로 가!”라고 하자 모두가 구령을 제창하면서 열을 지어 도청으로 들어갔다. 도청 앞에서 사망자, 행불자를 신고, 확인하러 온 시민들은 우리에게 뜨거운 박수를 쳐주었다.

학생들을 데리고 본관 3층 회의실로 들어갔다. 마침 도청 대변인을 받고 있던 윤상원형이 외신기자와 회견중이라 우리는 회의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 때 김윤기가 회의실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는 알철모를 쓴 채 카빈총을 메고 보초를 서고 있었다
 
김윤기에게 카빈총을 달라고 한 후 거기에 모인 70여 명의 대학생들에게 직접 총을 발사해가며 총기교육을 시켰다. 사실 김윤기도 군대에 가지를 않아 총기사용법을 모른 채 총을 메고 있었지만 문제는 야간에 교전상황이 발생했을 때 였다.

노리쇠의 스프링이 약해 한 방 쏘면 노리쇠가 다 전진하지 못해 총알이 발사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매일 밤마다 무전기에서는 총이 고장났다며 패닉상태가 된 시민군의 지원요청이 울려퍼졌다.

교육내용은 각개전투의 기본상식 정도였다. “현재 가지고 있는 우리들의 총은 6·25 때 쓰던 총이라 오래되었기 때문에 스프링이 약해 총을 쏘면 노리쇠가 후퇴된 후 완전히 장전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노리쇠 장전이 안됐다고 자꾸 방아쇠를 당기다 만약 실탄이 약실 안에서 터져버리면 화상을 입기 쉬우니 이때는 한 방을 쏘고 나서 노리쇠를 친 다음 방아쇠를 당겨라. 또한 사격 후에는 왼쪽으로 굴러라. 그래야만 적의 조준을 피할 수 있다”

한편 YWCA방(조아라 장로의 집)에서는 25일 옮겨온 투사회보팀이 활발한 활동을 했다. 26일 밤 들불야학 형제들과 투사회보팀의 20여명은 총기를 지급받고 YWCA로 돌아와 진을 치고 있었다. 왜냐하면 많은 양의 선전물들이 필요함을 알고 27일부터는 전남대 인쇄소를 사용하기로 했던 것이다.

당시 대동고 선생님이시던 박석무 선생님께서 전남대 사범대 오병문 학장에게 연락을 해주었고 마침 문선공과도 연결이 되어 27일 아침 전용호와 함께 투사회보팀을 전남대 인쇄소로 옮기기로 했다. 전남대는 자주 공수들이 출몰하여 시민을 죽이는 일이 발생했기 때문에 들불야학 형제들과 투사회보팀의 20여명이 함께 가서 경비를 서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광주시 외곽지역의 경비가 절실할 것 같아 우리는 시청에 전화를 걸어 구용상 시장에게 예비군동원을 요청했다.

“광주 시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향토예비군이 필요하니 광주 외곽 지역인 지원동, 산수동, 백운동, 운암동, 용봉동, 농성동, 광천동 등의 예비군을 동원해 주십시오”라고 하자 바로 그렇게 해도 좋다는 답변을 했다. 우리는 각 동사무소마다 전화를 걸어 27일 아침에 학생 2명씩을 보내 예비군들에게 무기를 지급하기로 했다.

밤, 피곤이 몰려왔다. 보초를 서고 있는 야학 형제들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YWCA경비대장을 맡고 있는 친구인 정연효(현재 멕시코 파견 선교사)에게 두 사람씩 묶어 보초를 세우게 하고 형제들은 방으로 들어가 잠을 자게 했다.

잠시 후 밖의 보초상황을 살펴보려고 나와 보니 YWCA 정문의 보초가 나무로 된 카운터에 앉아 밖을 향해 총을 겨냥하고 있었다. 깜짝 놀란 나는 그에게 말해 주었다.

“나무는 총알을 관통한다. 그리고 대한민국 육군의 사격술은 대단하기 때문에 밖에서 조준을 하고 쏘면 곧바로 죽게 된다. 시멘트 계단 뒤로 가서 몸을 숨기고 총구를 겨누어라”
그러나 그 사람은 내 말을 듣지 않고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 앉은 채 죽었다고 한다.

다시 건물 밖으로 나와 앞에 세워진 전남대 스쿨버스를 살펴보니 버스 안에서 김향득과 김광섭이 총을 들고 자고 있었다. 깜짝 놀라 그들을 깨워 ‘군인들은 처음에는 무조건 차에는 총을 갈겨대니 안으로 들어가서 자라’고 했다.

그들은 건물 안에 사람이 너무 많아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어 나왔다고 했다. 다음날 보니 그 차는 계엄군의 사격으로 벌집이 되어 있었다. 방으로 들어와 잠을 자려고 하는데 옆에 누워 있던 이충영과 김효석이 “형, 무장투쟁에 대해 알아요?” 라고 물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 읽었던 찰스 메이어가 쓴 ‘체 게마라의 일기’와 프란츠 파농의 ‘유격전술, 도시게릴라 전술’에 관한 부분을 애기했다. 그들은 귀를 쫑긋 세우고 열심히 들었다.

나는 이제 이 밤이 지나면 각 동의 예비군까지 향토예비군으로 편성되어 광주 시민의 무장항쟁은 승리를 거둘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27일 군인들의 가공할 진압작전으로 10일간의 광주항쟁은 물거품으로 끝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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