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꽃이라 이름 부를 때
너를 꽃이라 이름 부를 때
  • 문틈/시인
  • 승인 2013.05.29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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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섶에 앉아 작은 꽃들을 본다. 꽃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너무나도 작은 꽃들이다. 마치 바늘 끝으로 꼭 찍어놓은 듯한, 잘 들여다보아야 겨우 눈에 들어오는 꽃들이다. 처음엔 하얀색인가 싶었는데 한참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그 작은 꽃잎들에도 단장을 했는지 푸르스름한 색깔을 꽃의 가장자리로 둘렀다.
게다가 이 꽃들은 꽃잎이 다섯 개의 잎으로 펼쳐져 있다. 귀엽기도 해라. 이름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이름도 모르는 이 꽃들이 무리지어 피어나 아주 작은 바람결에 일제히 흔들리는 모습을 무슨 대단한 발견이라도 한 것처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들여다보았다. 누구의 눈길도 받지 못한 채 길섶에 있는 듯 없는 듯 피어 있는 이 꽃들에게 축복 있어라.

뭐 꽃이란 이름을 알아야 더 가치가 있는 법이라고 누군가가 한 말이 떠올라서 이 순간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 작고도 작은 꽃들은 이름을 모르는 편이 오히려 더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던 것이다.
어떤 시인은 “내가 꽃이라고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고 세상의 한 소식을 깨달은 것처럼 노래하고 있으나 이 잘 뵈지도 않는 꽃들에게는 그런 노래는 가당치 않다. 나는 외려 거꾸로 노래하고 싶다. 내가 꽃이라고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내게로 와서 바스러져 버렸다.

그렇다. 모든 꽃들은 우리가 뭐라고 불러주었을 때 그 순간 꽃 본연의 진실한 모습을 상실하고 우리가 지칭하는 그 꽃으로 엉뚱하게 변해버리고 만다. 장미는 장미라고 이름하기 훨씬 전부터 장미였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바로 그 장미가 진짜 장미였던 것이다.
사람이 무엇이라고 이름을 불러주는 그 순간부터 세상의 모든 꽃들은 더 이상 ‘그 꽃’이 아니다. 우주의 숨결과 향기와 맵시로 태어난 진선미한 꽃들은 사람들이 뭐, 뭐, 뭐 하고 이름을 부르면서부터 더 이상 꽃이 아닌 흡사 조화와 같은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길섶에서 허리가 뻐근하도록 앉아 작디작은 꽃을 보고 얻은 한 생각이다.

사실 말이란 무서운 것이다. 무엇에 대한 정의를 내린다는 뜻에서, 그리하여 그 정의 바깥에서는 그 사물을 볼 수 없게 한다는 점에서 그렇지만, 본디 말없는 무명의 저 태초의 순간으로부터 우리가 모두 이 세상에 건너왔다는 것을 짐작한다면 말이란 우리의 눈을 가리고 귀를 막는 색안경이나 귀마개 같은 것이기도 하다.
태초에 말이 있었다, 고 하지만 이 말은 그 보다 전엔 말이 없었다는 뜻의 다른 표현이다. 나는 세상의 이 아름다운 것들, 참한 것들, 선한 것들은 필시 태초 이전의 말없는 때에 이미 태어났다고 본다. 그러므로 우리가 꽃을 보고 꽃이라고 이름 부르는 것은 인간이 가진 원초적 서글픔, 안타까움 같은 것이라고 생각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여기 살아서 무꽃을 무꽃이라고 부르면서 살아가는 것은 무꽃이 태어난, 그러니까 우리가 태어난 그 이전의 때로 가지 못하는, 우리의 삶이 단 한 순간에 머무는 어쩔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을 지고 살아야 하기에 겪는 고통이라고 보는 것이다. 우리가 이 고통을 넘어선 다음에야 진정코 그것에 합당한 이름으로 모든 꽃들의 이름을 불러주게 될 것이다.
지난달 길거리에 부처님 오신 날에 걸어둔 연등이 밤하늘의 별처럼 불빛을 밝힌 적이 있다. 마치 내가 본 길섶의 이름 모르는 꽃들처럼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이름 모르는 것들의 순수여, 아름다움이여. 아, 부처님이 오시기 전에는 누가 부처님이었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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