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수유 나무에게 물어봄
산수유 나무에게 물어봄
  • 문틈/시인
  • 승인 2013.04.17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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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 피는 꽃들은 대체로 노란색, 하얀색, 분홍색, 빨간색 순서로 피는 것 같다. 산수유, 백목련, 진달래, 철쭉이 차례를 기다렸다 피듯이. 드물게는 지난해 봄처럼 순서를 어기고 한꺼번에 뒤섞여서 피는 해도 있다. 꽃이 피는 데도 자연에는 우리가 모르는 질서가 있음이 분명하다.
봄의 꽃빛깔은 눈부시게 화려하다. 아주 작은 꽃들도 저마다 눈부시게 단장하고 자태를 뽐낸다. 그 강렬한 빛깔을 한 모습이 흡사 무어라고 말을 걸어오는 것만 같다. 나는 꽃을 볼 때마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그 꽃들을 향해 몇 마디 찬미를 하고 난 다음에야 발길을 뗀다. 네 옷차림이 정말 화사하고 아름답구나. 꽃마다 그런 찬미를 보내는 것이다.

나는 수많은 봄꽃들 가운데 유독 산수유를 좋아한다. 잔가지에 노란 보풀이 일어난 것 같은 꽃들. 도무지 존재감이라곤 없이 조용히 무엇인가를 응시하고 있는 듯한 모습은 흡사 산문에서 한 소식을 깨우친 늙은 선사가 중생들이 사는 속세로 하산한 모양새다.
산수유를 알게 된 것은 사실 몇 년이 채 되지 않는다. 내가 알아차리기 훨씬 전부터 마을 여기저기 피었던 모양인데 그동안 눈에 뜨이지 않아서 오랫동안 모르고 지냈다. 어쩌면 보았더라도 무슨 꽃인지도 모르고 별 관심도 없이 지나쳤는지도 모른다. 산수유꽃은 야단스럽거나 화려하지 않고 그저 있는 듯 없는 듯 거기 피어있다. 그래서 내 눈에 뜨이지 않았던 것 같다.

어느 해 봄 이른 저녁참이었다. 저녁 별들을 헤아려보려고 고개를 젖히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데 누군가가, 아니 무엇인가가 내 뒤에 다가와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았더니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저만큼 짙어지는 어둠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바로 가까이 길가에 내 키보다 훨씬 큰 나무가 나를 향해 손을 뻗듯이 가지들을 내밀고 있었다. 꽃이랄 것도 없는 노란 덩어리 같은 것들이 몽글몽글 피어있는 가지들이었다. 그 나무가 산수유였다. 몽글몽글한 작고 노란 꽃들이 가지마다 안개처럼 자욱하게 피어 있었다. 은은한, 은은한, 산수유꽃과의 만남. 나는 한참이나 그 나무 밑에 서서 산수유나무를 바라보았다.

일년 중 가장 먼저 핀다는 산수유. 그러고도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 그저 제 존재를 한사코 숨기려는 듯 가만히 서 있는 나무. 대체로 꽃들은 한 송이 한 송이 제 맵시를 자랑하듯 눈부신 색깔로 저 자신을 드러낸다. 한데 산수유만은 나무 전체를 감도는 노란 아우라로 피어나지 한 송이씩의 개념이 없다. 한 송이 꽃은 없고 한 그루 꽃나무로 존재한다.
나는 해마다 봄이 올 무렵이면 산수유나무에 꽃이 피는 것을 기다린다. 산수유나무에 꽃이 피는 날 봄이 왔음을 선언한다. 그리고는 거의 매일 산수유나무 꽃그늘로 가서 묵언의 자세로 산수유나무와 잠시 대화를 나눈다. 워낙 산수유는 말이 없으므로 나 또한 말없이 산수유와 교감을 나눈다. 사실 내가 나무에게 무어라 묻거나 전할 것도 없다.

산수유는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나는 믿는다. 봄 한철 피었던 꽃들의 지나감을, 꽃들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그리고 사람들이 꽃이라고 불러주기 전부터 그것들이 꽃이었음을. 하지만 산수유나무는 그저 이 모든 질문과 대답을 말하지 않는다.
나는 산수유나무에 꽃이 피어있는 것을 볼 때마다 그 아래로 가서 서 있고 싶다. 세상고락을 잊고 헌 옷 자락에 풀려나온 보풀 같은 그 꽃그늘 아래서 만물의 시작과 끝을 생각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기에는 꽃이 핀 산수유만한 나무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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