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광주공원 앞 광장, '야시장'은 어떤가
9. 광주공원 앞 광장, '야시장'은 어떤가
  • 시민의소리
  • 승인 2001.06.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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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 야시장을 만들면 어떨까. 어쩌면 가장 먼저 대상에 오를 수 있는 곳이 광주공원 앞 광장이 아닐까. 이곳에 즐비한 국밥집과 포장마차촌은 서슬퍼런 전두환정권시절 심야영업을 금지했을때도 유일하게 예외지역이었던 것을 비롯 현재까지 50여년간 독특한 '밤문화'를 형성해 왔기 때문이다. 이곳의 역사를 더듬어가면 또 일제를 만난다. 이는 물론 오늘날 광주도시의 기본 틀을 잡은 것이 일본제국주의자들이라기 때문에 이상할 것도 없지만 말이다. 광주 도시의 기본골격은 1910년 일제가 광주읍성을 철거하면서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고 1921년 조선총독부가 임명한 일본인 광주군수와 광주면장에 의해 제기된 '대광주건설계획'이 결정적인 것이었다. 대광주건설계획은 1921년초에 제기됐으나 1925년 구라시나마쓰다로우(倉品益太郞)가 광주면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됐다고 한다. 바로 하수도설치, 하천개수, 시장정비 등 소위 시가미화정화를 위한 '면3대계획'이 그것인데 그 결과 1930년께에 오늘날의 광주도심을 형성하는 기본틀이 완성됐다는 것이다. 하수도설치사업은 광주최초의 근대적 하수도신설사업이었으며, 하천개수는 광주천 정비사업으로 현 사직공원 앞 금교부근부터 양동시장 부근까지의 하천 폭을 좁혀 직선화하고 천변도로를 개설한 것이었다. 이때 매몰될 하천부지 및 토지를 매립하고 새로 구획하여 시장, 상가, 공장, 운동장 등 시설부지 및 일반대지로서 분양하려는 광주최초의 신시가지개발사업이었다고 전해진다. 시장정비는 이런 하천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천변의 크고 작은 시장을 없애고 대신 현 사동(당시 향사리)의 매립지에 점포 470칸의 일명 '광주시장'을 설치했는데 1930년 4월 시가구획정리에 따라 '향사리'가 '사정'으로 바뀌면서 시장이름도 '사정시장'으로 변했다고 한다. 사정시장은 상설시장으로 5일장이었던 양동시장보다 컸는데 양동시장이 커지면서 오히려 쇠퇴해 지금은 시장의 흔적도 없어진 것이다. 하천정비사업은 또 도시계획을 통한 공원계획과도 연결되었는데 1924년 일본 왕세자의 결혼을 기념하는 사업으로 구강공원(현 광주공원)의 시설을 확장하고 사직공원일대를 기념공원으로 지정한 것이 그것이다. 오늘날 광주공원 광장의 국밥집은 한국전쟁이후 광주시장의 점포 앞에 노점상인들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전해내려온다. 당시 모습은 여느 시골장터의 풍경을 상상해보면 된다. 지금의 광장앞 국밥집들은 시장시절에는 일본식 목조건물로 된 점포였는데 그 앞에 좌판을 열고 막국수와 돼지머리와 내장을 넣은 국밥을 팔던 상인들이 있었다. 그런 상인들중에 손이 크고 인심도 후해 손님들에게 음식을 듬뿍듬뿍 주던 여인이 성공해 지금의 동백식당을 인수, 최초의 국밥집을 열었다. 동백식당은 '곰보집'으로 더 유명한데 여주인 임복례씨(95년께 사망)가 '곰보'여서 그렇게 불린 것으로 식당을 열고도 좌판때처럼 인심이 후해 손님들이 끊이지 않자 주변에 하나둘씩 똑같은 식당들이 생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14곳의 국밥집이 성업중이다. 지금도 단골손님이 가장 많은 동백식당은 임씨의 첫째, 둘째, 셋째딸이 차례로 이어받아하다 지난 85년부터 임씨의 다섯째딸과 결혼한 김연한씨(50)가 맡았는데 현재는 동백식당은 임대해주고 바로 옆에 더 넓은 부부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광주공원 앞 국밥집이 광주시민들의 기억속에 남아있는 것은 전두환정권시절 심야영업을 금지하던 시절에도 이곳만은 예외였기 때문이다. 김씨에 따르면 처음에는 국밥집끼리 경쟁관계였는데 정부가 심야영업을 금지한다는 발표를 하자 단합해 관광서를 설득해 예외를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당시 이들이 주장한 논리는 정부가 과소비 등을 이유로로 심야영업을 금지했는데 국밥은 주로 서민층이 이용했고 가격도 저렴해 과소비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워 받아들여졌다는 것. 80년 5월에는 광주공원 앞 광장은 시민군들의 훈련소며 무기보급소였다. 이때 국밥집도 시민군들의 식당으로 활용됐었고, 87년 6월항쟁이후에도 시위가 있을때마다 시위군들의 피난처로 활용될 정도로 민주화운동 역사에서도 한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지금은 광주공원 앞 광장 식당가도 예전같지 않다고 한다. 21개의 포장마차까지 밤이면 불야성을 이루지만 밤 11시대를 제외하고는 손님들이 많이 줄었다는 것이다. 김연한씨는 그 원인으로 자동차문화의 정착을 꼽는다. 바로 자동차가 대중화되면서 시내중심가의 광주공원 앞까지 일부러 오는 이들은 추억을 되새기지 않는 한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광주공원 앞 광장이 예전의 명성을 되찾으려면 뭔가 변화가 모색돼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곳을 야시장으로 명소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이같은 연장선이다. 외국 유명관광지의 야시장처럼 광주공원 앞 광장을 중심으로 주변을 다양한 볼거리와 먹을거리, 즐길거리가 있는 밤문화촌으로 만들자는 것이다. 이어진 기사- 광주공원은 광주공원 노인복지회관 앞에는 5층 석탑이 있다. 이 탑이 없었다면 지금의 광주공원의 건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구전에 의하면 광주공원이 있는 사직산은 형세가 거북이 모양인데 처음에 어떤 건물을 짓더라도 거북이가 움직이기 때문에 집이 무너져 내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라시대 한 스님이 거북이의 머리를 돌로 눌러놔야 어떤 건물도 무너지지 않는다고 해 지금의 자리에 5층 석탑을 쌓았다는 것. 일제가 만든 광주공원은 정복과 지배의 관계를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도 해석되고 있다. 일제때 광주공원 지금의 현충탑이 있던 자리에서는 일본군의 사격훈련과 제식훈련을 벌이곤 했는데 바로 밑 구강시장에 모인 광주사람들에게 위협적이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일제의 의도를 잃을 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런 위치에 지금 현충탑이 들어서 있다는 것은 또다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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